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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19.이탈리아

피렌체

by 시경아빠 201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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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더 사랑한, 피렌체

 

 

독일인의 카페에서 미래주의자의 혁명을 : 레푸블리카 광장

피렌체는 언제나 '그냥'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았다. 현대의 마천루에 지쳤지만 야생의 삶과 친해지고 싶지도 않은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게 이 영원한 르네상스의 도시는 거의 유일한 해답이었다. 이들은 피렌체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사랑했고, 거기에서 고대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찾았다.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이 현대화를 위해 망치를 들 때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막아 나서기도 했다.


현재의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lica)은 19세기에는 오래된 시장 거리가 남아 있던 동네였다. 그러나 피렌체가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면서 현대화에 들어갔고, 외국 거주민들의 반대에도 옛 건물들은 헐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광장 주변의 고풍스러운 카페들은 여전히 그 시대의 국제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가리발디 장군의 '붉은 셔츠'의 이름을 딴 '기우베 로세(Giubbe Rosse)'는 20세기 초반 독일인 형제에 의해 열린 카페다. 피렌체의 독일인 커뮤니티로 자리 잡았다가, 곧 이탈리아 미래주의자의 살롱이 되었다.

 

 

전망 좋은 방: 베르톨리니 펜션에서 시뇨리아 광장까지

"이탈리아에는 친절함을 바라고 오는 게 아니다. 인생을 바라고 오는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직전, 유럽의 교양인들에게 피렌체는 절대적인 여행지였다.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했고, 죽으려면 거기서 죽어야 했다. 이 시대의 분위기는 E. M. 포스터의 소설 [전망 좋은 방 - A Room with a view, 1908년]에 가장 잘 드러난다. 영국 처녀 루시는 부유한 친척과 함께 피렌체로 여행을 온다. 아르노 강 옆의 베르톨리니 펜션에 묵은 그녀는 '전망 좋은 방'을 얻기 위한 실랑이 속에 에머슨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루시와 에머슨이 거닐던 피렌체는 아직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산티시마 광장의 페르디난드 상, 산타 크로체의 단테 기념비, 그리고 운명적인 기절의 장면이 연출되는 시뇨리아 광장. 베르톨리니 펜션은 문을 닫았지만,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판 [전망 좋은 방]의 촬영장이었던 호텔 데그리 오라피(Hotel Degli Orafi)가 그 대체물이 될 만하다. 루시가 보았던 전망(View) 역시 여전히 그 도시에 있다. 오렌지 빛 퍼즐 같은 지붕들, 아르노 강과 다리, 성벽 너머의 언덕과 사이프러스 나무들.


 

 

무솔리니와 차 한잔: 카페 도니


피렌체를 특히 사랑한 외국인들은 영국과 미국 출신들로, 19세기 후반부터 커다란 군락을 이루었다. 1930~40년대에는 '스코르피오니'라고 불리는 영국 부인들의 상류사회가 형성되었는데, 그 모습은 영화 [무솔리니와 차 한 잔]에 잘 드러난다. 이들은 카페 도니(Gran Caffé Doney)나 우피치 미술관에서 차를 마시며 그들만의 호사를 누렸다. 애초에 이 부인들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관대한 입장이었지만, 2차 대전은 그 모든 걸 뒤엎었다. 무솔리니가 아비시니아(현재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영국은 반대 성명을 냈고, 이에 파시스트 병사들이 '도니'에 난입해 행패를 부렸다. (이 침공으로 이해 이탈리아가 막강한 커피 국가가 되었으니, 커피와 홍차의 전쟁을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전쟁이 본격화되자 영국 부인들은 성곽 도시인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에 감금된다.


토르나부오니 가(Via de' Tornabuoni)에 있던 '도니'의 가장 유명한 손님은 바이올렛 트레푸시스(Violet Trefusis).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에 등장하기도 하는 레즈비언 작가인데, 피렌체에는 미국과 영국의 청교도적 억압에서 탈출한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가 오래도록 이어져오고 있다고 한다. 

 

 

히틀러도 차마 부수지 못한 다리, 폰테 베키오

폰테 베키오(Ponte Vecchio)는 이름 그대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교각이 있었고,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대홍수 뒤에 새로 건조된 1345년. 무심코 길을 걷다보면 자신이 강을 건넌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양쪽에 다층의 상점 건물로 웅성거리는 수상한 다리. 중세의 피렌체에는 이처럼 건물로 둘러싸인 다리가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베키오가 유일하다.


2차 대전 동안 피렌체를 잠시 지배했던 독일군은 연합군의 북침으로 인해 도시를 버리고 도망가야만 했다. 잠시라도 적의 진군을 막기 위해 다리를 폭파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마지막 순간, 히틀러는 폰테 베키오만은 남겨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수기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리 남쪽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독일군이 설치한 지뢰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진흙의 천사들: 아르노강과 피렌체 국립도서관


 

아르노가 없는 피렌체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운 강의 주변에는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이 반짝인다. 피렌체 시민들은 14세기부터 아르노의 상류와 하류를 막아 강의 유속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갈수기와 홍수, 양쪽을 대비한 것이리라. 그러나 1966년의 대홍수 때에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이었다. 살아 있는 르네상스의 박물관인 이 도시의 대부분이 수몰되었고, 온갖 예술품들이 흙탕물과 진흙 속에서 썩어갔다. 홍수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강변에 붙어 있던 피렌체 국립도서관(Biblioteca Nazionale Centrale Firenze)이었다. 완전히 격리되어버린 이곳은 소장품의 1/3에 해당하는 13만 점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가혹한 자연의 횡포에 맞서 세계의 예술 애호가들이 모여들었다. '진흙의 천사들(Mud Angels)'이라 불리는 이들 자원봉사자들은 도시 곳곳의 수해를 복구하고, 물에 젖은 책과 그림과 조각들을 닦아내고 말리는 일에 나섰다. 때는 히피들의 시대라, 낮에는 책과 미술품을 말리고 밤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나날이었다고 한다.

 

 

500년 전의 공무원을 사랑한 여인: 시오노 나나미와 친구 마키아벨리

1960년대 일본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좌절에 빠진 한 여성이 지중해 세계에 매료된다. 도시 국가의 흥망과 르네상스의 문화는 그녀로 하여금 역사야말로 진정한 엔터테인먼트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1970년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펴내며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한 그녀, 시오노 나나미가 정착한 곳은 피렌체. 그녀는 500년 전 이 도시의 공무원이었던 한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폰테 베키오의 남쪽, 마키아벨리가 살던 집의 바로 이웃에 거주하며 이 남자의 삶과 사상을 연구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보면, 그것은 단순한 역사학자의 집념이라기보다는 페티시즘에 가까워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과연 근무처였던 팔라초 베키오에는 어떤 방법으로 출근했을까? 동서남북의 문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해 직장에 들어갔으며, 퇴근 후에는 어디로 나가 무엇을 했을까? 그녀는 피렌체를 어슬렁거리며 이런 호기심들을 채워나갔다. 그로 인해 독자들 역시 기꺼이 마키아벨리의 친구가 되고 말았다.


 

 

한니발의 숨은 거처, 팔라초 카포니의 도서관


 

외국인들이 득시글거리는 동네이니, 누군가 신분을 숨기고 슬그머니 숨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 최악의 상상이라면, 아마도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렉터? 영화 [한니발]에서 그는 닥터 펠(Dr Fell)이라는 이름으로 피렌체에 살고 있다. 팔라초 카포니(Palazzo Capponi)의 도서관이 그가 기거하며 연구에 몰두해 있는 곳이며, 도시 이곳저곳이 영화의 무대가 되었다. 박사의 정체를 수상하게 여긴 형사 파치가 그를 염탐하는 곳은 레푸블리카 광장의 카페, 파치가 박사의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 팔찌를 사는 곳은 폰테 베키오, 오페라가 상영되는 곳은 산타 크로체 옆의 파치 성당이다.

 

 

 

피렌체는 베네치아와 더불어 도시 국가의 전형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결코 넓지 않은 도시이기에 산책하며 하루를 보내면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맛을 더하려면 시간과 공간, 양쪽의 축을 파헤쳐야 한다. 시간의 축은 여행 전에 충분한 독서로 피렌체 안에 남아 있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내면을 깊이 있게 파헤치는 것. 골목을 돌 때마다 단테,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이 툭툭 튀어나온다. 공간의 축은 피렌체 바깥의 토스카나 지역으로 발을 넓히는 것.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으로 와인, 햄, 과일 등 온갖 식재료가 넘치는 요리의 천국이다.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반 [투스카니의 하늘]로부터 힌트를 얻어도 좋다.

 

 

 

 

 

 

글·지도 이명석
저술업자 겸 도시수집가. 인문학적인 테마를 즐거운 놀이로 만드는 ‘인문주의 엔터테이너’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여행자의 로망백서],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이 있다. 미투데이(me2day.net/manamana)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이 코너는 박사와 격주로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