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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인터넷 속의 세계사

엘리자베스2세

by 시경아빠 2009.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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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엘리자베스 2세가 통치했던 영국은 무사했고 영국인들에게 마음의 여왕(Queen of Heart)이 됐다.또한 수많은 왕가들이 붕괴된 20세기에 두 개 이상의 독립국을 다스리는 유일한 군주이다. 과연 무엇이 그녀를 여왕이게 했을까?

 

 

영국은 역사상 시민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나라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백 년도 훨씬 전인, 1625년에 영국인들은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찰스 1세를 조용히 저승으로 보냈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난 지 63년 뒤, 영국인들은 명예혁명을 일으켜 제임스 2세를 가볍게 나라밖으로 내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군주제를 폐지하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국인들은 왜 왕조를 유지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영국의 왕가는 몰락한 다른 왕가들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명예혁명 끝나고 얼마 후, 영국에는 왕위를 이어받을 스튜어트 왕가 자손이 바닥나 버렸다. 결국 의회는 독일에서 스튜어트 왕가의 먼 친척을 데려와 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하노버 왕조의 시조인 조지 1세다. 평생 독일에 살았던 조지 1세는 영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잘 몰랐고 아예 영어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 후로 영국에서 정치적 실권을 쥔 것은 의회였고 왕은 자연스럽게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하노버 왕조의 가장 큰 문제는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왕의 위엄을 유지하느냐’ 였다. 어떻게 해야 군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것인가?

 

시간이 걸렸지만 하노버 왕조는 그럭저럭 자신의 역할을 찾아냈다. 그것은 국기나 국가처럼 왕이 국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왕의 역할이란 대외적으로는 영국을 대표하고, 대내적으로는 계급은 달라도 우리는 폐하의 신하라는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자손을 많이 두어 다른 나라 왕실과 사돈을 맺어 외교적 결속을 다져놓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 모든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던 하노버 왕조의 군주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그런데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죽음으로써 하노버왕조가 끝이 난다.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 출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의 둘째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아이들에게는 하노버가 아니라 작센-코부르크-고타라는 성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작센-코부르크-코타 왕조가 시작되면서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아주 나빠졌다. 세계 1,2차 대전 일어나자, 영국과 독일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입장이 곤란해진 것은 독일에 본가를 두고 있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였다. 더군다나 1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얼마나 많은 왕조들이 무너졌던가? 그들도 같은 꼴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한 몰락을 막기 위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는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한다. 우선 작센-코부르크-코타라는 성부터 '윈저'로 바꾸었다.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격려했다. 또 국민들이 싫어한다면 외국 왕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왕가는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은 국민들에게 통했다. 이러한 혁신을 통해 윈저 왕가를 모범적인 왕가로 탈바꿈시킨 인물이 바로 메리 왕비였다. 사실 그녀의 남편 조지5세는 군주로서의 임무보다는 사냥을 더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이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바로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 할머니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 4월 21일 런던의 브루튼가(Bruton Street) 17번지에서 태어났다. 곧 그녀에게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고 알렉산드라는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메리는 할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왜 그녀의 이름에 고조할머니의 이름, 빅토리아가 붙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은 그 긴 이름대신 그녀를 릴리벳이라고 불렀다.

 

릴리벳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녀가 고조할머니처럼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큰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왕세자가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조지 5세가 죽자 에드워드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바로 에드워드 8세이다. 그러나 운명은 때때로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지 일 년도 못 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 이것이 세기의 스캔들이라 불리는 윈저공과 심슨 부인의 사랑이야기다. 이제 영락없이 차남이자 릴리벳의 아버지인 앨버트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차례였다. 그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거기다가 앨버트는 사람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말더듬이가 아니었던가!

 

 

 

1936년 결국 앨버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지 6세이다. 더불어 릴리벳은 아버지의 추정상속인이 되었다. 그 말은 앞으로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는 한,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자, 릴리벳의 교육문제가 중요해졌다. 릴리벳의 아버지는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 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왕이 될 교육을 받은 큰아버지는 자신의 자유연애를 위해 왕위를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릴리벳은 아버지, 조지6세처럼 되지 않기 위해 이 때부터 왕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큰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개인의 행복보다는 왕으로서의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배워야 했다.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은 훌륭한 교사들 밑에서 배우면 그만이지만 왕으로서의 책임은 교사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릴리벳에게는 군주로서의 책임을 가르쳐줄 누구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릴리벳의 할머니인 메리 왕비와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비였다.

 

 

할머니 메리 왕비는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왕실의 위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에게 대중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보다 왕실의 위엄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 역시 왕실의 의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릴리벳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다. 런던이 독일 비행기에게 폭격을 당하자, 릴리벳과 그녀의 동생 마가렛은 버킹검을 떠나 윈저성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두 공주들을 캐나다에 있는 하틀리성으로 피난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왕비는 이렇게 거절했다.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에요. 나는 왕의 곁에 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왕께서는 결코 조국을 떠나지 않으실 겁니다.” 전쟁 도중 메리 왕비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누구보다 먼저 모범을 보이고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국민들에게 선심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릴리벳은 열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 조지6세를 귀찮게 졸라댔다. 자신에게도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자신도 입대해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딸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던 조지6세는 결국 타협책을 찾아냈다. 1945년 3월 4일 릴리벳은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투부대에 배치되는 대신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WATS; 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배치되었다. 1938년 창설된 WATS는 젊은 여자들로 구성된 부서였다. 원래 WATS는 부대 안의 취사와 심부름, 그리고 매점 관리를 맡아보던 곳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자 WATS의 업무도 점점 커져 운전이나 탄약 관리까지 맡게 되었다. 릴리벳의 계급은 소위(Second Subaltern)였고 군번은 230873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맡은 일은 군용 트럭을 모는 일이었다. 릴리벳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트럭을 몰거나 탄약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지금까지 거친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었던 그녀가 흙바닥에 앉아 타이어를 바꾸고, 보닛을 열어 엔진을 수리했다. 그러나 릴리벳은 아주 즐겁게 그 일을 해냈다. 아마 그 시절이 그녀의 인생 중 유일하게 같은 또래 여자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기회였을 것이다. 릴리벳은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동생 마가렛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 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때의 경험이 즐거웠던지 훗날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가정교사에게 교육시키는 대신 학교에 보냈다. 같은 해 5월 8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세계 2차 대전이 끝났다. 그녀는 동생과 함께 시내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승리를 축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에게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다. 그러나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은 하루가 무섭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그 후 실론, 버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가 잇달아 독립했다. 한때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제 영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몰락의 속도만큼은 늦추어야 했다. 영국은 영국연방을 통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1949년 조지 6세는 영국연방 국가들에 의해 영국연방의 수장으로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53개국이나 되는 영국연방 국가를 돌아다니며 결속을 다지기에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 그 일을 맡은 것이 그의 후계자였던 릴리벳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지 6세의 병은 점점 악화돼갔다. 1952년 2월 6일 마침내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을 미처 슬퍼할 틈도 없이 의회는 그날로 그녀의 왕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관식은 조지 6세의 장례식과 애도 기간이 끝난 뒤에 치르기로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그녀에게 또 한 차례의 슬픔이 찾아왔다. 엄격했지만 그녀를 매우 사랑했던 할머니 메리 왕비가 죽은 것이다. 메리 왕비는 죽으면서 이렇게 유언을 했다. "절대로 내 장례식과 애도 기간 때문에 릴리벳의 대관식이 연기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리고 그 유언은 지켜졌다. 연이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속에서 릴리벳은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영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신 앞에 맹세했다. 거기에는 작은 릴리벳은 없었다. 군주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엘리자베스 2세만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 나온 엘리자베스 2세 전기나 평전은 없다. 만약 영국의 역대 왕들과 엘리자베스 2세의 공식적인 삶을 알고 싶다면 두 권의 영국사를 추천한다. 하나는 옥스퍼드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펙이 쓴 것이다. <옥스퍼드의 영국사>가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면 스펙의 <진보와 보수의 영국사>는 진보와 보수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영국사를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책으로 여왕과 왕실 가족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고 싶다면 프리어스 감독의 <더 퀸(The Queen)>을 추천한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여왕의 만년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클 것이다.

옥스포드 영국사진보와 보수의 영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