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연히 보수적이 된다지만,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 당혹감은 그의 대표 저서인 <대동서>를 들춰 보면 더욱 짙어진다. <대동서>는 그가 변법개혁에서 주장했던 내용은 상대도 안 될 만큼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그 책에서 사유재산의 존재가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므로 사유재산을 없애야 하며, 재산의 욕심은 가족을 잘 먹이고 입히려는 데서 나오므로 가족도 없애야 하고, 입헌군주제도 넘어서 황제를 없애고, 나아가 국가도 없애 세계를 하나의 집처럼 만들고 모든 공직자는 선거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도 일체 없애야 한다고 했다. ‘대동’이란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에서 착안한 개념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유교의 핵심인 삼강오륜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불교적이며(“세상은 왜 이토록 고통으로 차 있는가?”), 대안은 서구의 인권,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뒤섞여 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동서>는 그가 20대였던 시절에 지은 이상주의에 치우친 저작이며, 이후 변법개혁기에는 보다 현실과 타협하는 쪽이 되고, 그 뒤에는 더욱 보수화된 것이라고 풀이한다. 한편 그의 사상에는 일관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대동’이란 ‘난세’와 ‘승평’을 잇는 최종적인 역사의 발전단계이며, 강유위가 보기에 당시는 아직 난세에서 승평으로 넘어가는 단계일 뿐이었다. 그것은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넘어가는 단계라는 뜻도 된다. 따라서 그는 변법개혁 때 <대동서>의 정치를 실현하려 하지 않았고, 이후 복벽운동에 참여한 것도 “공화제 이전에 반드시 입헌군주제가 와야 한다”는 자기 사상에 대한 고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강유위가 동아시아의 전환기를 살면서 각종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미처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사상으로 내놓으면서 이상하거나 모순이 되는 부분이 적잖게 남은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곧 근대화, 즉 서구화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서구화에 저항해야 했던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공통된 모순이었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들이 단지 불쌍히 여기던 일반 대중의 뜻에 따른 개혁, 일반 국민의 현실을 반영한 사상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고귀한 개혁이라도, 그것이 전통에 기반했던 서양 사상에 힘입었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