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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인터넷 속의 세계사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의 순서로 그 사용된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by 시경아빠 201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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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의 순서로 그 사용된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

(1) 초원길

먼저 초원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초원길은 동서양을잇는 이 세 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 역사를 살펴보자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초원길은 스키타이인들의 활동무대였습니다. 이 스키타이인들은 초원길을 달리면서 그리스 페르시아 지방에서 시작된 청동기 문화를 다른 지방으로 전파하게 됩니다.

이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나라 중에는 우리나라도 끼여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학교에서 우리나라의 철기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청동기 문화는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을겁니다.

스키타이인의 뒤를 이어 초원길의 지배자가 된 민족은 흉노족 입니다. 이 '흉노'라는 이름은 중국 및 동양에서의 이름이고, 서양에서는 이들을 'Huns' 즉 '훈'족 이라고 합니다.

기억나시죠? 로마제국 말기시대에.. 훈족의 이동으로 밀려난 게르만 인들이 대거 로마 국경을 넘어 국내로 이주해왔다는 '게르만족의 대이동', 바로 그 원인이 되는 '훈'족이 바로 흉노인 것입니다.

이들은 약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이 길을 통하여 서방으로 진출했으며 그 결과 유럽 동부에 살던 게르만 인들이 이들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밀려서부로 쫓겨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게 됩니다. 기원후 3세기부터 4세기 까지 초원길을 활용한 민족은 다섯민족이나 됩니다.

중국역사의 한페이지를 5호 16국 시대라는 이름으로 장식하고 있는 다섯 오랑캐(흉노, 선비, 저, 갈, 강) 가 바로 그들이지요. 이들은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중국본토에 저마다의 세력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그 때 이들이 돌아가면서 세운 나라가 총 16개 나라가 되기 때문에 5호 16국 시대라 명명된 것입니다. 다섯 오랑캐를 이어서 돌궐족과 위구르 족이 초원길을 내달립니다.

이 두 민족은 이길을 통하여 보금자리를 옮겨서 위구르는 중동지방에 '서하'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고요. 돌궐족은 후에 서양에서 '투르크'라 불리면서 공포의 존재로 남게되죠.^^;

흉노의 '훈' 과 마찬가지로 돌궐 의 서양식 이름이 '투르크' 랍니다. 이어서 약 9세기부터는 마자르 족이 이길을 활용합니다. 사실 마자르족은 중동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초원길을 이용하여 유럽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이들이 동유럽으로 밀려오자 온 유럽이 벌벌떨게 됩니다.(어째서 동양에서 서양으로 옮겨가는 민족들은 '모두' 공포의 대상이 되는걸까요;;ㅋ)이들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지금의 '헝가리' 입니다.

또 셀주크 투르크도 이 길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켜서 결국 아랍세계의 패자가 됩니다. 셀주크 투르크에 이어서 이제 이 초원길의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네요..ㅋ

초원길을 마음껏 '내달렸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민족...바로 몽고족입니다.

몽고는 서하와 서요, 금을 굴복시킴으로 동방을 정리하면서 바투로 하여금 서방을 정벌하게 합니다. 세계사 시간에 들어보셨을겁니다. 바투의 '유럽 원정'! 바로 그 무대가 되는 곳이 초원길 지대인 것이죠.

몽고의 대원정이 마쳐진 이후에는 이 초원길로 선교사들이 왕래를 합니다. 주로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이 이 길을 따라 동으로 가게 되지요. 이상으로 초원길에 대한 설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사막길(비단길)

사막길 혹은 비단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이탈리아로부터 시작되어 소아시아지방, 서아시아, 이란고원과 중앙아시아를 지나 파미르고원, 타림분지를 거쳐 중국의 장안까지 연결되는 길이랍니다.

중앙 아시아로 뻥 뚫려 있는 이 교통로는 다른 어떤 길들 보다도 동서양의 문화교류에 있어 큰 역활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이 비단길의 시작부터 차근차근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단길은 본래 아랍 사람들이 교통로로 사용하던 구간에 중국 전한시대에 반초가 개척한 장안까지의 길이 더해지고 이길이 서쪽으로 유럽까지 확장되어 완성되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반초라는 신하가 이 비단길을 개척했으며 전한이 멸망한 후에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비단길 구간에 오랑캐들이 출몰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질 뻔 하였으나 후한이 다시 성립되면서 감영(삼국지에 나오는 감영과는 동명이인 입니다.)에 의해 다시 개척되게됩니다.

이시대에 비단길을 통해 전래된 유명한 문화는 바로 불교와 인도 쿠샨 왕조의 간다라 미술을 들 수있는데요.. 불교는 중국에 전파되어 마침내는 한반도, 일본까지 거쳐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간다라 양식은 동쪽 끝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끼쳐서 석굴암의 불상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답니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위.진.남북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혼란기를 맞아 비단길이 또다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의외로 이때는 굳건하게 잘 보존 된답니다.

덕분에 수많은 구법승들이(기독교의 선교사와 마찬가지라고 보시면 될듯,)이 길을 따라 세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뱀다리를 하나 놓아보자면.. 삼국시대때 백제에 온 마라난타 스님도 이 구법승들 중에 하나였답니다.ㅋ

구법승들이 지나간 길에는 자신들이 살았던 지방의 문화.. 즉, 인도의 굽타 미술이 전파됩니다. 그 이후, 수나라를 이어 당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부터는 이 비단길을 대단히 중요시 여기게 됩니다.

특히 이 교역로를 오가는 상인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상인이 많이 다녀야 돈을 버니까.) 길을 따라 절도사를 배치해 치안을 유지하였답니다.

특히 당나라 영토 서부에 복속되어 있는 비단길 지방에는 안서도호부를 두어 그 지방의 안정화를 꾀했습니다. 길이 안정되니까 상인의 왕래도 잦아지고 당연스레 구법승도 더 활발하게 왕래하게 됩니다.

이렇게 비단길이 차차 안정되어 자리를 잡자 당나라는 이 막대한 이익을 독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참 잘나가던 때에 당나라 남쪽에 자리잡은 토번(지금의 티벳)과 아랍의 사라센 제국이 당나라가 가지고 있는 이익을 나눠먹으려고 손을잡고 당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국경에 자주 출몰하여 약탈을 하는 식으로 당나라를 괴롭혔는데요.. 이렇게 하면 비단길을 통해 오던 상인들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고, 따라서 상인들이 비단길 가기를 꺼려하게 되겠지요.

상인이 오지 않는 당나라는 더이상 이득을 보지 못할테고요. 이런 계산을하고 사라센 제국과 토번이 말썽을 부리는 겁니다. 그러자 보다못한 당나라는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요량으로 아예 대군을 일으켜 이들을 토벌하기위해 나서는데 이때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인 고선지 장군이 군을 이끌게 됩니다.

고선지 장군의 휘하 장병들은 연전 연승을 하며 비단길과 주변 치안을 다시 확립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배가 부르면 사냥을 그만두지만 사람은 배가 부르면 다른 마음을 품는다던가요?

배부르게 된 당나라는 비단길의 이익금을 독점할 욕심을 품게됩니다. 결국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에게 서역을 정벌할 것을 명하여 전 비단길을 당나라 영토안에 넣으려는 욕심을 밖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탈라스 전투에서 당군이 패함으로 당나라의 비단길 지배 야욕은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비단길은 또다시 잠수를 타게 되는데요. 중국 본토의 잦은 정권교체로 인한 혼란이 그 이유입니다. 이후 송나라 시대에는 오랑캐의 공격 때문에 비단길 보다는 바닷길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몽고제국이 나타나서 서역원정을 할 때까지 비단길은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게 됩니다.


(3) 바닷길

자 이제 마지막 교역로인 바닷길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바닷길은 유럽 이탈리아에서 시작해서 지중해를 거쳐 홍해로 접어들던가 잠시 육로로 서아시아를 통과, 페르시아만으로 접어들게 되어 인도 남아시아 중국까지 연결되는 교역로 입니다.

이중에 지중해 항로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페니키아, 카르타고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가 활용하던 항로입니다.

또한 중부와 동남아시아 해로는 기원전 1세기에 인도에서 개척하는데요, 아라비아해에서 부터 동남아시아까지 뻗어나간 대항로입니다. 인도의 불교가 동남아시아로 퍼지게 된 것도 이 길을 따라 이루어진 것 입니다.

기원후 8세기 부터는 이 길을 통한 아랍인의 활동이 눈에 띄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산품을 한 배 가득히 싣고 이길을 따라 중국에까지 가서 장사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 아라비아 인들은 신라의 경주까지 와서 무역을 했답니다! 고분들에서 발견되는 유리공예품들은 모두 이들의 특산품이며, 이것이 아라비아인들이 신라까지 와서 무역을 해갔다는 증거인 것이죠.

이것은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당시의 조선기술을 생각해 볼 때 '목숨을 건 모험'이라고 밖에 생각하기 힘든 일이기에 놀라운 것입니다.

자, 이제 이야기의 방향을 중국 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사실, 당나라 이전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이 바닷길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왜나하면 뻥 뚫린 비단길이라는 육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대외 무역에 신경을 쓰는 왕조들이나 이런 생각을 가졌지 대다수의 중국왕조는 혼란기에 자기 몸 하나 건실하는데 급급하여 다른 것에는 눈을 돌릴 여유도 없었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이 바닷길의 유용함을 파악하고 '시박사' 라는 것을 설치하여 바닷길을 관리하게 합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해양수산부' 장관이랄까요..?ㅋ

당의 뒤를 이은 송나라는 영토상으로 이 바닷길에 아주 목숨을 걸게됩니다. 왜냐하면 이전 왕조까지 활용해서 득을 봤던 비단길은 황폐해져서 더이상 사용하기 힘들어졌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오랑캐들의 방해까지 더해져 더이상 비단길은 상인들이 안심하고 지날 수 있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공으로 하북지방을 빼앗기면서 송나라는 비단길과 단절이 되고맙니다. 결국 남송은 오랑캐들이 출몰하지 못하는 바닷길로 진출하게 됩니다. (오랑캐들은 말은 잘타지만 배는 잘 못탄다지요..ㅋ)

덕분에 이 남송시대엔 중국의 선박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늘게됩니다. 우선 대양에 나가더라도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해지고 많은 상품을 실을 수 있도록 선박의 크기도 커졌습니다. 또한 망망대해에서도 길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돕는 나침반도 바로 이시대에 중국에서 발명되게 된답니다.

다음으로 명나라에 이르면 중국의 조선기술은 동양 제일이 아닌 세계최고가 됩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이 되다보니 명나라 황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데요. 오랑캐를 내몰고 '한'족의 나라를 부흥시킨 대 명국의 위대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대 원정'을 떠나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세계 만방에 대 명국의 이름이 퍼지고 온나라의 '어버이'가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이 원정의 총대장은 정화 라는 사람이 맡게 됩니다.

세계사 시간에 '정화의 대 원정' 이라고 배운 것이 바로 이 원정에 대한 이야기이죠. '대 원정' 이라고 해서 서양식으로 병사를 이끌고 가서 창칼로 실력행사를 하여 자국 영토로 복속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위대한' 문물을 전해주고 그나라의 '조공'을 받아서 다시 명국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조공'도 중국사람 입장에서나 '조공'으로 생각했지 주는 쪽 입장에선 단순한 '선물' 이었겠죠?^^ㅋ

아무튼 이 정화의 원정단은 당시 세계 어느나라도 건조하지 못할 커다란 선박을 수십척이나 이끌고 아프리카 서안까지 다녀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대원정'은 이 때 이후로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답니다.

명 말기에서부터는 이 길을 따라 유럽사람들이 중국을 찾아와 교역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교역은 허울일 뿐 실제로는 중국을 한번 먹어보겠다는 야심이 깔린 계략이었죠.

이미 유럽인들은 이 길을 통해 아시아로 와서는 이동네 저동네 찾아다니면서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서글픈 일이지만 아시아의 유럽 식민지화도 이길을 통해 이루어졌답니다.
출처
[직접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