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4.중국/청도5일(2015)

중국 태산 곡부 여행 (2015072526)

by 시경아빠 2015. 7. 7.
반응형

7월25일(토)

숙소 -> 청도역으로 이동

1). 청도에서 고속철로 태안으로 이동 7:28-10:38

 

 

* 청도역에서 곡부동역으로 바로 넘어가면 되는데  기차표가 1등석밖에 없어 태안 경유해서 곡부로 이동함 *

* 당초 태안역에서 환승해서 곡부로 내려갈려고 했으나 열차안 승무원에게 입석표를 구입해서 곧장 내려감

 

 

 

 


 

태안역에서 곡부동역으로 이동 (10시 38분 ~ )

 

 

 

 

 

http://tvpot.daum.net/mypot/View.do?playlistid=3450591&clipid=52632387#page=5&playlistid=3450591&clipid=52632387

 

 

 

 

 

 

 

 

곡부동역에서 숙소인 곡부유스호스텔로  이동 (택시로 30위엔)

 

 

고속철에서 출발하는 k01 버스

If you arrived at Qufu Train Station, you could take bus No.5 and get off at the station of BAI YI SHOPPING CENTER,

then take bus No.1 and get off at the station of Yan Temple.

Take a Taxi to our hostel cost about 14CNY from Qufu Train Station.

If you arrived at Qufu Dong Train Station,

you could take bus No.K01 and get off at the station of NANMEN,

then take bus No.1 and get off at the station of Yan Temple.

 

 

 

* 숙소 : 곡부 유스호스텔(http://www.yhachina.com/ls.php?hostID=1&id=43)

공부에서 5분거리 (3인 가족실 이용, 150원)

 

 

 

호텔

 

 

 

 

* 오후에는 곡부 여행(공묘, 공림, 공부) 13:00~18:00

 

 

 

 

우리는 공묘-> 공부 -> 공림 이 순서로 둘러봤는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공묘는 공자를 기리는 사당

공부는 공자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곳

공림은 공자의 묘가 있는 곳이다.

=>블로그 http://blog.daum.net/tkfkdaq/71

=> http://blog.naver.com/seojumo/220113786284

 

 

 

 

공자(孔子)의 고향 곡부(曲阜)찾아
니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 얻어 이름을 중니(仲尼)라 불러
한자의 뿌리를 보면 삼수(氵)변이 들어간 글자들은 거의 강(江)이다.

 

산동성의 강을 보면, 공자(孔子)의 마을에 흐르는 강을 수수(洙水)라 하며, 수수가 흘러 사수(泗水)가 되고, 다시 기수(沂水)와 만나며, 회수(淮水)에 이른다.

제남으로 흐르는 강은 제수(濟水)이며, 유방(濰坊)으로 흐르는 강은 유수(濰水)이며, 임치에 흐르는 강은 치수(淄水)이다.

공자의 부친은 추읍의 숙량흘(叔梁紇)이 안씨의 딸 안징재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 안씨는 ‘그 일을 부끄러워하여 아들에게 무덤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후한의 유학자 정현(鄭玄)의 기술이다.

 

이 야합이라는 단어를 맨 처음 쓴 사람은 사마천이다. 숙량흘은 안씨의 딸과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 니구산(尼丘山)에 기도해서 공자를 얻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세가'편에 나오는 말이다. 숙량흘이 늙었고 안징재가 어려서 적령기에 혼인하는 예절, 즉 비녀 꽂는 예를 올릴 수 가 없기 때문에 야합이라고 했다.


'야합'이란 말의 구체적인 내용은 60세의 숙량흘과 20세의 안징재 사이에서 공자가 태어났다는 말이다. 숙량흘은 그 이전 첫 번째 부인 시(施)씨에게서는 딸 아홉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는 아들 하나를 낳는다.

이 아들은 논어에도 공자의 형으로 소개되는 맹피(孟皮)로 다리를 저는 등 문제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맹(孟)은 큰 아들이란 뜻이고, 피(皮)는 신체에 장애가 있다는 뜻이다.

안징재는 세 번째 아내인 셈인데, 니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어 이름을 중니(仲尼)라 했으며, 혼자 그 근처 산자락에서 공자를 키웠다. 니구산 자락에서 태어난 공자는 7, 8세쯤에 당시 노나라 수도인 곡부로 옮겨왔다. 궐리(厥里) 어디쯤 살면서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자는 19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노나라 소공이 득남을 축하하여 잉어를 보내왔다. 이를 기념하여 '잉어 리(鯉)자'를 써 ‘리’라 지었다. 그는 사회 생활을 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참으로 미미한 한직이었다. 작은 마을의 수납관이 되어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거나, 가축을 관리했다고 한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은 젊었을 때 천한 사람이라고 했고, 사마천도 그러한 기록을 했던 점으로 보아 공자에게는 이어받을 만한 어떠한 기득권도 없었던 것 같다.


2014년 3월 13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곡부] 공묘

공림 (곡부)곡부의 북쪽 1.5Km 떨어진 곳에 공자와 자손의 묘가 모여있는 곳으로 20헥타르에 이르는 광대한 삼림지대로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있고, 수수교의 북쪽에 공자의 분묘가 있다.

 

 

공씨들의 가족묘 공림(孔林)
공림(孔林) ,공자를 모신 무덤이자, 공씨 성 가진 이면 누구나 묻힐 수 있는 공씨 집안 묘
일반 사람들의 무덤을 묘(墓), 왕의 무덤을 릉(陵), 세자나 세자빈은 원(園), 여러 사람이 묻혀 있는 것이나, 왕이나 왕비라는 짐작은 가지만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으면 총(塚), 신분을 알 수 없고,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무덤을 분(墳), 성인이 묻혀 있는 것을 림(林)이라 한다.
공림(孔林)은 공자를 모신 무덤이자, 공씨 성을 가진 이면 누구나 묻힐 수 있는 공씨 집안 가족묘이다. 지성림(至聖林)이라 쓰인 문을 들어서면 양 옆으로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공자 묘비가 있는 묘역은 20헥타르 넓이에, 2만 여 그루의 나무가 들어서 있다.

제자들이 시묘하면서 여러 수종의 나무들을 옮겨 심어 추모의 마음을 보탰다고 한다. 공림은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은 씨족 묘지이다. 어느 제왕이 이런 사후 영광을 누리겠는가. 만세사표(萬世師表)가 된 그 분은 번창한 후손의 영령을 거느리고 제자들의 넋인 양 오늘도 푸르기만 한 빽빽한 숲 속에 잠들어 있다.

공자의 묘에는 황금색의 전서로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 쓰여 있다. 명나라 시기인 1444년에 건립되었는데, 여기에 특이한 것은 왕(王)자가 밖에서 보면 간(干)자만 보인다. 이는 황제가 참배할 때 왕(王)자가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간(干)자만 보이고 자세히 보면, 길게 쓴 간(干) 밑에 한 일(一)자가 붙어 있다.

묘 바로 왼쪽의 작은 집은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시묘 살이 6년간 하면서 살았던 곳이다. 묘 동쪽에 있는 세 개의 정자는 송나라 진종(眞宗),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가 공자의 묘를 참배할 때 쉬어 간 곳이다.

공림 입구에 수수교(洙水橋)가 있다. 수수(洙水)가 흘러 사수(泗水)와 합치고, 다시 사수(泗水)는 기수(沂水)와 합친다. 기수(沂水)는 다시 회수(淮水)와 만나 바다로 흐른다. 그래서 수(洙)를 공자, 사(泗)를 공자의 아들 리(鯉), 기(沂)를 손자인 자사(子思)로 보며, 유학(儒學)을 수사학(洙泗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묘 (곡부)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사당을 세운 곳이다. 그후 역대의 황제가 기부나 희사를 계속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고, 북경의 고궁(故宮), 태산의 대묘(岱廟)와 더불어 중국 3대 건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남북의 길이가 약 1㎞ 남짓하며, 면적은 약 22만㎡로서 전체 건물의 방의 개수가 466개에 이른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제2의 대건축으로 높이 24.8m, 폭 45.7m, 길이가 24.9m이다. 28개의 돌기둥 가운데 정면의 10개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은 듯한 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14.중국 > 청도5일(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자를 모시는 사당 공묘(孔廟)
'생민미유(生民未有)' '아직까지 공자와 같은 성인은 태어나지 않았다'
대성전 가득한 측백나무조차도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대성전 높이만큼 자라면 그 이상의 성장을 멈추는 것인지 더 이상 위로 뻗어 오르지는 않는다.

 

이 공묘에서 한 고조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자 태뢰(太牢: 나라에서 소를 잡아 제사 지내는 일)의 예로 크게 제사를 올린 것을 비롯하여, 청나라 강희제는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조아리는 대례를 치렀고, 건륭제는 9회나 오체투지의 예를 올렸을 만큼 그는 후세의 사표가 되었다

역대 제왕이 올린 시호(詩號)도 다양하다. 노 애공은 추도문에 니보(尼父)라 높였고, 한나라 평제(平帝)는 추존하여 니선공(尼宣公)이라 불렀다. 당 현종은 왕으로 한 단계 높여 문선왕(文宣王)이라 추존했고, 송대에 와서는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불리다가, 원나라 성종대에 와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자가 공부를 가르쳤던 행단(杏壇)이 나온다. 대성전에 '생민미유(生民未有)'이란 글씨가 있다. '아직까지 공자와 같은 성인은 태어나지 않았다'는 글이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로 모든 경서를 없앨 때, 공자의 8대 후손이 벽에 감추고 흙을 발라버린 후, 나중에 발견되었던 노벽(魯壁)이 있고, 공자가 마셨다는 우물이 아직도 있다.

중국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반으로 동강난 비를 붙여 놓은 것을 이곳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문화대혁명 때 입은 상처의 흔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행단에 있는 비석에 당(黨)자가 있어 그것만은 부수지 않았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황제는 이곳을 8번이나 방문하여, 그의 딸을 공씨 가문으로 시집을 보내기도 했다. 청나라 고전극 ‘도화선(桃花扇)’의 작가인 공상임(孔尙任)이 공씨 집안의 사위이다.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공부는 성부(聖府)라고 적혀 있다. 정문을 들어가면 중광문(重光門)이 나온다. 이 문은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다. 공부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여, 여자들이 사는 곳은 남자들이 못 들어가, 물을 길러줄 때도 물은 밖에서 부으면 안에서 받아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중국의 10대 명주에 속하는 공부가주가 공씨 가문에서 만들어내는 술로 후손들이 돈을 벌어 가문을 빛낸다고 한다.

공묘(公廟)는 공자의 사당이다. 금성옥진(金聲玉振)이란 현판이 달린 문루에서 시작되는 공묘는 곡부시 정중앙에 자리 잡고, 공묘의 한 가운데는 대성전이 있다. 그 옆으로는 공자를 예찬하여 찾은 역대 제왕들의 13개 어비정(御碑亭)안에 50여개의 비가 빼곡하다.

이 대성전은 북경 자금성에 있는 태화전, 태산 아래 태안시에 있는 대묘(천황전)와 더불어 중국 3대 건축물로 손꼽힌다. 공자는 ꡐ안회, 증자, 자사, 맹자ꡑ 네 성인을 굽어보고, 12명의 대유학자에 에워 쌓여 남면하고 앉아있다.


 

 

 

 

공부 (곡부)공부(孔府)는 1038년에 세워져 공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으로 공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으로 서로에는 객실, 동로에는 공씨 가문의 묘지가 있고, 중로에는 전반부의 관공서와 후반부의 주택으로 나뉘어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16만㎡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될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이다. 당시 공씨 가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공자 후손이 살았던 공부(孔府)이야기
中, 東, 西, 三路에 즐비한 436개의 방, 공씨 문중 영화의 극치
공부(孔府)는 공자 후손들의 생활과 집무공간이다. 왕실로부터 제후의 대접을 받아온 공자의 후예들이, 삼청(三廳) 육당(六堂)이 있는 이곳에서 공사 업무를 처리하고, 역대 제왕을 접대하던 공간이기도 하다. 中, 東, 西, 三路에 즐비한 436개의 방은 공씨 문중 영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송나라시대부터 공자의 자손에게 공자의 덕을 이어가는 고귀한 성통이라는 연성공(衍聖公) 작위가 주어졌다. 유교의 성현 공자의 77세 직계후손인 공덕성(孔德成)은 대만고시원장을 지냈으며 88세로 2008년 10월 28일 사망했다.

그는 학자이며, 서예 연구가, 미식가로 살아왔다. 그는 1920년 곡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생후 100일 되던 날에는 연성에 봉해졌고, 집안에서는 '어른'이란 의미로 공야(公爺)라 불렀다.

1936년 12월에는 손기방(孫琪芳)과 결혼해 이듬해인 1937년 일본군이 산동성을 점령하자, 당시 국민당의 장개석은 사단 병력을 보내 공씨 부부를 구출해 냈고, 그 직후부터 항일 운동에 앞장섰다.

1949년 국민당 정권이 대륙에서 쫓겨날 때 함께 대만으로 건너갔다. 당시 장개석 총통은 대량의 황금과 문화재와 함께 데려온 27세의 공씨를 '국가의 중요한 보물'이라며 보살폈다. 2500년 동안 공자의 신성한 혈통을 전승해왔기 때문에 '옥새'보다 중요한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1935년부터 특별직인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 공자 봉사관(奉祀官)을 무려 73년 동안 역임하면서,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1955년부터는 대만대학 중문과와 인류학과 교수로 예기와 금문(金文)을 가르쳤다. 1984년부터 9년간 대만 고시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공자의 78세인 장자 유익(維益), 79세인 수장(垂長), 80세인 우인(佑仁)으로 이어졌다.


2014년 3월 22일


출처 :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7월26일(일)

곡부에서 태산으로 가는 방법

일반철도와 고속철을 이용하면 되는데

고속철(1시간30분) 이 일반 철도(20분) 보다 빠르나

곡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태산에 도착해서도 사내 중심지까지의 소요 시간이 길다.

그래서 결론은 ...

일반 철도를 이용하기로

표는 씨트립에서 예약하는 경우 수수료 부담 (1인당 20cyn)* 3명 = 일만원이 넘어서

현장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으로 함

 

 

1. 태산역에서 천외문까지 시내버스로 이동(3,37,39번버스)

* 택시 이동시 50원 요구 (실제는 20원정도면 가능)

 

2. 태안역 -> 관광청 승합차 ->천외문

 

 

천외문 도착해서  표 구입 ( 셔틀버스 편도  + 입장료 (157원)

 

그리고 중천문-남대천까지 케이블카 (편도 100원,  15분 소요)

* 도보로 오르는 경우 2시간 정도 (내려오는 경우는 40분 정도)

 

케이블카 내려서 정상까지 넉넉히 1시간 소요

 

총 4시간이면 충분 (2015년 7월 기준)

도보로 이용하는 경우 5시간 소요

 

 

 

 

 

 

 

 


 

두보가 올라갔던 태산 이야기
'태산에 올라 앉아 사방을 굽어보니 ...이제야 호연지기를 누려볼까 하노라

'층층이 피어나는 구름에 가슴을 훤히 열고,

눈을 크게 떠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노라.

모름지기 정상에 올라,

모든 산들이 적다는 것을 알겠노라'


 

시인 두보가 태산에 오르면서 지은 망악(望岳)이란 시이다.

태산을 올라가는 코스가 몇 개 있는데, 중천문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올라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남천문과 도화원에서 올라가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고 7천개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런데 짐꾼들은 많은 양의 짐을 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산의 높이는 1,545m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태산을 높은 산으로 생각하는가?
평평한 평지 위에 바로 태산이 우뚝 솟아 있고, 바위산으로 험하게 생겼기 때문에 높게 보일 뿐만 아니라, 오르기 힘든 산이기 때문이다.

태산은 과거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중국 명물중의 하나였다.

황제가 천하태평이 지상에서 실현되기를 신에게 비는 의식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그래서 덕망이 있는 황제에게만 허락되었는데 진나라의 시황제, 한나라의 무제, 당나라의 현종, 청나라의 강희황제를 위시하여 72명만이 봉선을 했다.


 

중천문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완만한 돌계단을 오르면 운보교(雲步橋)가 나온다. 운보교를 지나 왼쪽의 영객송(迎客松)을 옆으로 끼고 돌계단을 밟고 가다보면 오대부송(五大夫松)이 있는 오송정에 도착한다.

옛날 진시황이 봉선을 위해 산에 오르던 중에 큰 폭풍우를 만나 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해 이 소나무에게 오대부 작위를 주었고, 지금 남아 있는 3그루는 청나라 옹정황제가 1730년에 다시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올라가면서 황제나 유명인들의 글씨를 볼 수 있고, 오악독존(五岳獨尊), 조화종신수(造化鍾神秀), 일람중산소(一覽衆山小)의 글씨도 있다. 나도 태산에 오르고 나서 ‘태산에서’라는 시조 한 수를 지었다.


 

'태산에 올라 앉아 사방을 굽어보니

세상이 좁은 줄을 이제야 알겠구나

이제야 호연지기를 누려볼까 하노라'


2014년 3월 9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 태산 여행 12:00~16:00 ( 케이블카 이용시 -> 왕복 4시간이면 충분)

 

출처 => http://blog.daum.net/byhkmgkht/1303

 

중국 오악의 첫째인 태산은 고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한 신성한 산이며,

해발 약 1545km로서 산둥성 구릉에서도 최고에 명산으로 꼽히는 산이다.

도보로 오를 경우 8-9시간 걸리지만 케이블카를 이용할 경우 태산 입구에서 왕복 4시간이면 등정이 가능하다..

(케이블카등정 -> 남천문 -> 옥황전 -> 남천문 ->케이블카하산, 약 3시간 소요)

 

 


해발 800고지의 중천문에서 케이블카 탑승 에 올라탄다.

출발부터가 아찔하다. 겁먹지 않은 척 10분정도 몸을 맡기니 태산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온다.

정상인 옥황정은 여기서도 보이지 않는다. 광장처럼 잘 닦여진 길을 10여분 걸으면 남천문이 나타난다.

중천문에서 남천문까진 3000여개의 돌계단이 있다.

남천문은 총 7000여개 태산 계단길(십팔반)의 종착지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이곳부터는 ‘천가’라 불린다.

하늘에 오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600여m 이어지는 천가에선 말 그대로 선경이 펼쳐진다.

두말할 필요 없다. 태산에 한번 올라 보시라.

거기서 20여분 정도 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정상인 옥황정(1545m)이다.

이곳에선 두보의 시에 나오는 ’기필코 정상에 올라 둘러보니 뭇산이 작기만 하구나’ 하는 경치를 체험할 수 있다.

태산은 자고로 황제를 위한 산이었다. 태산 정상인 옥황정은 하늘로 가는 지름길로 통했다.

당연히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늘의 지존인 옥황상제께 제사를 지내며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봉선의식이다. 상나라, 주나라 등 72명의 왕이 이곳엣 봉선의식을 치렀다.

진시황도 분서갱유 후 3년이 지나 태산을 찾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한 황제이건만 하늘이 무섭긴 무서웠나 보다.

진시황이 태산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소원성취의 산으로 잘 알려진 태산이지만 태산은 결코 진시황의 불로장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지금도 태산에선 소원을 품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소원을 품고 수천개의 돌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정상 근처 사당에서 향을 태우며 소원을 비는 모습은 경건하기 짝이 없다.

 

 

태안 유스호스텔 정보

 

 

 

 

 

태산에서 태안역으로 이동 => K37번이 있어서 부랴부랴 탔다. 출바알~~~~!! 40분넘게 탔던거 같은데

 

 

 

 

태안(18시13분) -> 칭다오로 이동

 

 

칭다오역에서 콥톤호텔 찾아가는 방법

아고다 http://www.agoda.com/ko-kr/

 

 

 

 

 

 

 

 

 

청도(칭다오) 여행준비 자료모음 (청도- 태산- 곡부 - 청도)   (0) 2015.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