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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답사자료집

융건릉( 화성)

by 시경아빠 201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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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관리소에서는 사도세자로 잘 알려져 있는 추존왕 장조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능인 융릉과 그의 효성스러운 아들 22대 왕 정조가 잠들어 있는 건릉이 자리 잡고 있다.hwp

 

 

 

 

융릉관리소에서는 사도세자로 잘 알려져 있는 추존왕 장조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능인 융릉과 그의 효성스러운 아들 22대 왕 정조가 잠들어 있는 건릉이 자리 잡고 있다. 추존왕 장조의 능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억울한 누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재조영하였다.

 

 

 

 

 

 

 

 

 

 

 

 

 

 

 

 

 

 

추존왕 장조(莊祖)- 사도세자

 

능의 구성

융릉은 훗날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훗날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면서 혼유석은 하나이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한다.

 

능의 역사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무덤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그러므로 혜경궁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1789년 현재의 위치로 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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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장조(莊祖) 생몰년도 : 1735년 ~ 17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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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이야기

장조는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의 생부이다. 1735년(영조 11) 1월 21일 영빈 이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효장세자(추존왕 진종)가 요절하였으므로, 2세가 되던 해인 1736년(영조 12) 3월 15일 왕세자에 책봉되고,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의정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1월 23일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및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모함을 하여 영조와 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1762년(영조 38)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폐서인한 후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숨지게 하였다. 이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였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화

『영조실록』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Home / 융릉 이야기 / 정조의 화성 행차 이야기 - 비극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임금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으로서 위대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1752년(영조 28)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국왕의 운명을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776년(정조 1)에 영조가 서거함으로써 당쟁의 와중에서 어렵게 25세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하여,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는 화성 행차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묘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승격시켰으며,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때마다 화성에 머물며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고, 한 차례의 행차마다 수십 건의 민원을 처리하였다.

 

8일간의 화성 행차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 8일간의 화성행차를 했던 기록을 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 아침 화성 행차에 나섰다. 1km에 달하는 현란한 깃발과 연주가 어우러진 국왕의 행렬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한 뒤 노량진 배다리에 이르렀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행차를 위해 6,000여 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되었는데,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24개 처의 요지에 배치된 수천 명의 척후 복병까지 계산하면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화성에서 치러진 화려한 회갑연

이 긴 행렬이 도착한 화성에서는 성대한 회갑연이 열렸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조선시대 왕실 행사 중 가장 크고 화려했던 행사로 궁중 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회갑 잔치는 오전 9시 45분부터 화성 행궁의 주 건물인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내외친척들도 초대됐다.

 

내빈이 13명이었고, 외빈이 69명이었다. 정조와 신하들은 차례로 혜경궁 홍씨에게 술잔을 올리며 천세를 불러 축하했고, 그 때마다 음악과 정재(呈才)가 공연됐다. 한양과 화성유수부 등에서 선발된 33명의 여령(女伶)들이 다양한 궁중무용을 추었다.

화성 행차를 통해 보인 개혁 의지

그런데 정조는 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도성이 아닌 화성에서 열려고 했을까? 그리고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끄는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날 정조의 화성 행차는 실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행렬이었다. 행렬에 동원된 3,000여 명의 군사들은 정조가 직접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는데, 장용영의 외영은 바로 화성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용영과 화성은 군제개혁의 상징이었고, 국왕의 정치개혁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상징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의지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1800년(정조 24) 49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남으로써,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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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융릉 이야기 / 화성 행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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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임시 처소로 건립된 행궁

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이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부의 관아를 옮겨짓고 행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793년(정조 17)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를 화성 행궁이라 하였다.

 

대대적인 확장을 거듭한 화성 행궁

화성 행궁은 1789년(정조 13) 장남헌(壯南軒 : 봉수당의 옛이름)을 중심으로 그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5월에 약 360여 칸의 건물들이 완성되었다. 1794년(정조 18)부터 화성 성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화성 행궁의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맞추어 주요한 건물들이 건축되었고, 화성성역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620여 칸에 이르는 건물들이 조성되었다. 또한 화성 행궁정리수성향곡(華成行宮整理修成鄕穀)이라는 별도의 제도를 두어 관리, 운영하게 하였다.

 

화성에 대한 정조의 특별한 포부

화성 행궁은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경복궁 다음가는 궁이라 할 정도의 규모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현륭원 천봉 이후 11년 간 12차에 걸쳐 화성에 행차할 만큼 정조의 능행이 정례화 되었고 이때마다 화성 행궁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성이 정조의 특별한 포부를 담은 도시였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 구축과 개혁을 향한 의지

화성 신도시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강력한 왕권 구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 머물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각종 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화성 행궁에 남겨진 미완의 계획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성과 행궁에 대한 정조의 계획들은 모두 미완의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1801년(순조 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건립되었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과 정조의 능인 건릉(建陵)에 전배하고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 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되었다.

 

 

융릉관리소에서는 사도세자로 잘 알려져 있는 추존왕 장조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능인 융릉과 그의 효성스러운 아들 22대 왕 정조가 잠들어 있는 건릉이 자리 잡고 있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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