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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포르투갈 발칸반도(2015)/동유럽·발칸(2015)

인물 탐구>나치 정권 2인자 하인리히 힘러.

by 시경아빠 2015.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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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firenze/3385143

 

 

소개할 인물은 단순히 단순히 나치 고위층이라서가 아니라,

그 인간 자체의 캐릭터 만으로도 흥미로운 녀석인...


"하인리히 힘러"라는 놈이 되겠다...





하인리히 힘러 or 히믈러






BOB나 기타 전쟁영화, WW2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독일의 SS(친위대) 또는,

무장SS(친위대) 라는 조직에 대해서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하인리히 힘러"는 그 무장친위대의 우두머리. 수장인 녀석이다.

이 사람이 어떻게 친위대 수장이 되었으며 왜 친위대란 어떤 놈들이고

왜 홀로코스트에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 간단히 설명하겠다.









힘러는 1900년 독일 바이에른 주의 란츠후트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중산층의 교양있는 집안 출생이다.

어린 힘러도 신앙심이 깊은 편이었다.

그의 주군인 히틀러가 중학교를 1년 꿇었을 정도로 공부를 못했던거와 달리...

힘러는 학교성적도 좋고. 유복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취미는 체스와 우표, 나비 수집이었다.

이런 아이가 훗날 유대인 150만명을 가스실에 넣어 학살한 괴물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통적이고 귀족적인 옛 프로이센 군대를 동경한 힘러는 어릴 적 부터 군인이 되는 꿈을 키워왔다.

17세 되던해... 힘러는 육군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전장에 투입될 날 만을 기다렸지만.
1918년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망하여 군인의 꿈은 접게 되었다.

그당시 대다수의 독일 젊은이들 처럼 독일의 암울한 분위기 때문에 힘러도 4~5년의 긴 방황을 했다.

히틀러가 빈곤과 가난 때문에 정서적 방황을 겪었다면.

힘러는 단순히 중2병에 걸려서 종교, 연애,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방황을 했다는 차이가 있다.








젊고 방황하던 힘러는. 히틀러와 마차가지로

그당시 유럽에 만연하면 반유대교 서적을 읽고 그 사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이 당시 읽은 책 몇권의 지식이 훗날 벌어질 대학살의 밑거름 되었음이 분명하다.

1922년..

젊은 힘러가 비료 공장에 취직하여 비료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퇴직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을 구상을 하고있었을 때에..

곧 어떤 만남이 힘러와 독일, 그리고 유대인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바로 이 사람.

나치당 폭력 전담반 행동대장 "에른스트 룀"과의 만남이다.

약한 소시민에 불과한 힘러 자신과 달리, 에른스트 룀은 매사에 정력적이고

남자다운 마초 전쟁 영웅이었다.

그리고 SA(돌격대)의 저돌적인 공격성과 유니폼 씹간지...

힘러는 히틀러가 아닌. 이 룀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흠모하기 시작한다.









1923년 힘러는 자신이 동경하던 나치에 입당한다.

그리고 SA(돌격대) 대원이 되었다.

힘러는 돌격대로 활동하며 맥주홀 난동사건,

뮌헨 폭동같은 굵직한 이벤트에 행동대원으로 참가 했지만.

워낙 말단 대원이었기에 경찰에 잡혀도 곧 풀려나는 잔챙이였다.

1925년..

힘러는 그당시 SA(돌격대)의 하부조직 수준이었던 SS(친위대)로 전출된다.

친위대는 1923년 창설되어 인원 120명 안밖으로,

본래 창설 목적은 나치당 당사 경비임무 라곤 했지만

사실 히틀러는 SA(돌격대)를 이끄는 "에른스트 룀"이 자신의 뒷통수를 때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SS를 만들었다.

친위대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계기는 히틀러가 친위대에게 개인 신변보호 임무를 맡기면서 부터다.

경호대 임무를 맡고 있지만 친위대는 국가 공무원 신분도 아닌 히틀러의 개인 사병조직화가 되었다.

처음에 그냥 SA 하부조직인줄 알고 들어온 힘러는 줄은 잘선 것이다.









힘러의 친위대 대원넘버가 168번 인걸 보면 친위대 안에서도 그닥 비중있는 인물은 아니였다.

하지만 곧..

이런 힘러는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데.

친위대가 발간하는 작은 지방신문사 업무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힘러는 독자확보와 광고영업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게 된다.

"사원 힘러"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초창기의 SS(친위대)는 능력있는 영업사원 한명도 없었을 만큼 무능한 놈들의 집합소 였던 것이다.

그렇게 수년이 흘러..

친위대 말단대원인 힘러는 드디어 나치당 최고수장 히틀러와의 만남을 갖게된다.

그전까지는 히틀러를 직접 볼 기회도 없었을 정도로 최말단이었다는 것이다.









히틀러를 처음 만난 힘러는 거의 종교적 신앙수준으로 히틀러에세 빠져들게 된다.

자신을 나치로 이끈 "에른스트 룀"이 아닌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짐한 것이다.

이때부터 힘러는 히틀러 자서전, 평론집, 어록집 따위를 읽으며 공부했고

더불어 중2병 취미인...

북유럽 신화, 아리안족 전설, 연금술,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단체에 대해서도 탐독했다.









자연스레 힘러는 저학력 꼴통들 집합소인 친위대 안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나치 선전부장 "요셉 괴벨스"의 눈에 들어온다.

괴벨스는 힘러를.. "지성이 넘쳐 흐르는 쓸만한 놈"이라 평가하고 힘러를 승진 시킨다.

(나중에 힘러가 괴벨스를 누르고 넘버2 였지만. 원래는 괴벨스가 甲이었다.)

그리고 괴벨스의 총애를 받는 힘러는 고속승진을 거듭한다.

이 당시부터 힘러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오직 히틀러를 위한, 히틀러를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힘러는...

종교를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집단최면"이라 비하하고.

교황을 공개처형 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1929년...

뛰어난 영업사원, 능력있는 회계사 "하인리히 힘러"는 공식적인 SS(친위대)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무능한 건달들의 집합소였던 친위대를 독일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변모시킨다.

그럴 수 있던 배경에는 히틀러의 후광이 있었다.

역사상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갖고있는 심리적 불안감을 히틀러도 갖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못믿는 것이다.

히틀러는 친위대를 더 확장하기로 결심한다.









"총통이 팍팍 밀어주는 단체".. 라는 이미지가 생긴 친위대에는

귀족 자제들, 고학력, 재산가 같은 사회 엘리트 계층들이 몰려들었다.

머리좋은 히믈러는 가장먼저 친위대 안에서도 가장 엘리트들만 모아서

"SS-SD"라는 비밀 정보부를 만든다.

SS(친위대)를 유니폼 맞춰입고 군대흉내나 내며 골목에서 패싸움을 벌이던

SA(돌격대)와 수준이 다른 인텔리 집단으로 만들었다.

친위대는 총통각하의 후광을 뒤에 엎고 자신들의 반대세력,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독일 경찰과 마찰을 만들게 된다.

사실 친위대는 누군가를 체포할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









히믈러는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경찰을 친위대에 흡수해 버렸다.

그리곤 일반 범죄를 수사하는 치안경찰과, 정치범을 수사하는 정치경찰로 나눴는데

정치경찰이란 그 유명한 "게슈타포"다.

독일이라는 한 나라의 사법권이 이런식으로 망가지다가.

끝내 1936년에 이르러선 힘러가 경찰총장도 해먹게 된다.

혼자 다해먹는다.









사법과 행정권을 먹고서도 만족하지 못한 힘러는 군대도 먹기로 결심한다.

우리가 잘 아는 "무장친위대의(Waffen-SS)"의 탄생이 그것이다.

힘러는 간지나는 흑색 휴고보스 친위대 유니폼을 입고 독일 국방군

"베어마흐트(wehrmacht)"을 기웃거려 보지만..

독일 국방군 장군들은 경찰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히틀러가 전 독일을 장악하고 있었어도, 아직 독일군에는 기라성 같은 전쟁영웅들과

뼈대있는 성골 프로이센 출신의장군들의 버티고 있었다.

히틀러의 엄포 따위는 씨알도 안먹히는게 당연했다.




삐진 힘러는 "아 님들.. 드럽고 치사해서 군대 내가 만들꺼임!" 이라고 말하곤

SS-VT라는 하부조직을 만든다.

무장친위대의 전신이다.









군대의 군자도 모르는 힘러가 만든 SS-VT는...

금발에 푸른눈, 큰 키, 간지나는 몸매, 게르만 순혈족보 따위의 심사를 통과한 대원들을 선발했고.

대부분은 군대 경험도 없이 그냥 쇼핑몰 피팅모델 같은 놈들만 모여있던 곳이었다.

절생긴 청년들이 휴고보스 제복을 입고 간지나게 패션왕 사열하는 것을 지켜본 독일 장성들은...

"뭐야 저 병신들은?"..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독일군 장교들은 SS장교들을 자신들과 동일한 군인 취급도 안해줬다

그들의 눈에는 친위대 애들은 밀리터리룩 입은 밀덕새끼들 그 이상 이하도 아니였던 것이다.











통찰력이 뛰어난 힘러도 "무장친위대의" 군사적 능력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1차대전 퇴역 장교들을 영입해 친위대 자체의 사관학교를 만들어 훈련을 강화하고

정치적 힘으로 징병검사에서 신체조건이 우수한 병사를 모조리 끌어갔다.

이러다 보니 친위대와 독일 국방군의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전쟁중에도 국방군 병사들은 친위대 병사들을 서로 존나 싫어했다.

이런 앙숙관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무장친위대에 설명은 간략히 마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힘러라는 인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현재의 나찌가 갖고있는 반인륜 범죄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였고.

논리와 비논리의 사이를 살았기 때문이다.









사상최악의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SS의 최고 수장인 힘러는 사실..

피만 봐도 식은땀을 흘리고. 포로수용소 시찰도중 러시아군 포로가 죽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걸 보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사람의 시체를 목격한 후 정신적 충격으로 사무실에 틀어박혀 덜덜 떨면서도

책상머리에선 "우수한 게르만의 종족보존을 위해 더 많은 열등 인종들을 처분해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힘러 자기 스스로는 파리도 못죽이는 나약한 지식인인 것이다.









사실 힘러는 유대인 자체에 대한 증오심은 별로 없었다.

유대인들이 증오스러워서 죽였다기 보단. 히틀러가 시키니깐 한거다.


유능한 회계사 자질을 발휘하여. 치밀하고 기계적으로 학살을 했다는게 더 충격적이다.

예를 들면..

기차 한칸에 유대인 500명을 가둬놓고 800km를 이동하면 1시간마다 몇명이 탈수증으로 죽고

배급량의 칼로리를 떨어뜨리면 몇명이 영양실조로 죽을지 전부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처리했다.









그러면서도 친위대 대원들의 복지에 힘쓴, 그들 입장에서는 훌륭한 상관이기도 했다.

부하들이 유대인을 죽이면서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학살과정을 자동화 하고

독가스를 이용한 대랭학살을 고안한 장본인이도 하다.

처음에는 총으로 일일이 쏴 죽였다.









전쟁 범죄자 힘러는 사실 유능하고 청렴한 공무원이었다.

헤르만 괴링같이 마약에 찌들고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미술품이나 약탈하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권력 최상위층 이면서 뇌물을 받지도 않았으며, 국가에서 주는 봉급만으로 소박한 서민주택에서 살았다.

부하들에게 금연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으며..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면 금주법을 내리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체스와 우표수집이었다.









힘러는 다른 나치 핵심전범들과 달리 합리적 사고를 갖고 있으면서도 비합리적 인간이기도 했다.

친위대 대원들에게는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금발머리, 푸른 눈, 큰 키에 대해 엄격히 따졌지만

힘러 스스로는 키도 작고, 금발도 아니였으며, 얼굴도 광대뼈가 취어나온 非게르만적 외모를 하고 있었다.

히틀러도 금발도 아니였고 게르만적 외모는 아니였지만...









종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촬영 영상을 시청한

괴링, 슈페어같은 살아남은 전범들은 크게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히틀러가 명령한 "최종적 해결방법"이란게 대략적으로 뭔지는 알았지만.
실제 모습은 몰랐던 것이다.

몰랐던 것보다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한다.

자살한 히틀러도 수용소의 정확한 모습은 몰랐을 것이다.

오직 힘러만 알고있었다.

힘러의 또 하나의 업적(?)은 현재 우리들이 알고있는 나치의 이미지를 만든 장본인 이라는 것이다.

"헬보이" "인디아나 존스"에서 나치가 고대의 초자연적 유물을 찾아 헤매고 그것으로 세계지배를

하려한다는 것은 힘러의 중2병적 취향 때문이다.











특히 친위대 입단식이 그 원인이다.

젊은시절 읽은 신비주의 오컬트 책의 원인인지 몰라도.

친위대(SS)의 입단식은 그 자체가 매우 특이했다.

중세에 만든 故성에 모여 룬 문자 같은 고대 게르만 문자와 온갖 초자연적 심볼이 가득한 장소에서

중세 튜튼 기사단이나 템플 기사단의 작위의식을 모방한 세레모니를 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갖고있는 나치의 이미지라 할수있는.

1.효율주의
2.잔학성
3.간지
4.오컬트

...는 힘러의 영향인 것이다.



아무튼.. 글이 너무 길어져서 힘러라는 인간에 대해 설명하자면 끝이 없기에 이만 마무리를 하자면

히틀러를 신으로 섬긴 힘러는 끝내 히틀러의 뒷통수를 치고 배신한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의 히틀러 벙커 코앞까지 밀어닥치자

힘러는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형님이 죽기전에 유언장에다 죽은뒤 후임은 나로 정한다고 쓰고 죽으쇼"

"아 그리고 내가 연합군과 단독 회담을 한번 할텡께 형님은 찌그러져 있으쇼"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걸 읽은 히틀러는 존나 빡쳐했다고 한다.









괴벨스나 기타 다른 충신들은 히틀러가 권총으로 자살하자 그 뒤를따라 자결을 했지만.

힘러는 민간으로 변장하고 베를린에서 냅다 도망쳤다.

한달뒤 영국군이 힘러가 숨어있다는 첩보를 받고 은시처를 급습하자

힘러는 자살용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마 죽기전에 벙커에서 자살한 총통과 자신이 가스실에서 죽인 100만명의 유대인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