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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도시, 바간(Bagan) - I
배강열 칼럼니스트 (2010.02.03 10:05:13)
미얀마, 짧은 마실의 기억 - I
크리스틴 조디스(Christine Jordis)는 미얀마를 일컬어 <아름다운 풍경에도 슬픔이 묻어나는 땅>이라고 표현했다. 더구나 그녀가 쓴 책 "미얀마 산책"에서 미얀마인의 정신을 반영하는 불교와 그 이미지를 충실히 담고 있는 불탑의 도시 바간을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난 한 해 어지러운 성정과 불가피하게 맞은 육체적인 고통들을 순한 마음으로 담아내고 또 추슬러 보려는 본능에 이끌려 한파가 한참인 때 미얀마로 짧은 마실을 다녀왔다. 출발부터 다녀온 지금까지 나도 조디스처럼 미얀마에서, 바간에서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을 느끼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이렇게 평정한 마음으로 고요함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삶의 담백한 맛에 대한 소망은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구체적이며 나아가 집요하기까지 한 내면의 나를 만나게 한다. 그만큼 삶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수동적으로 변하고 약해져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해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좋게 말하면 삶의 한 단면들을 마주칠 때마다 조금은 신중해졌다고 볼 수 있으며 나를 둘러싼 세상과 신에 대한 경외감을 무의식 속에서도 조금씩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간은 오래된 도시다. 여러 민족들이 각 지역별로 군웅할거 하던 미얀마에서 이곳 바간에 9세기경 파인바라는 부족장이 12개의 성문으로 된 전성(塼城)을 구축하면서 바간왕국을 세웠고 42대 아노라타(Anawrahta, 재위기간 AD 1044-1077)왕이 1054년에 최초로 미얀마 전역을 하나의 통일된 왕조(AD 1044-1278)로 만든다. 따라서 아노라타 왕을 미얀마 초대왕조의 태조로 기록하고 있다. 이미 부분적으로 불교의 유입이 있었으나 AD403년 소승불교가 남부 탈론(Thalon)왕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아노라타왕 시대에 소승불교의 급격한 전파가 이루어진다. 또한 아노라타 왕은 나라의 통합을 위한 정신적인 젖줄과 왕권유지의 수단 두 측면을 고려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발전시키는데 주력한다.
바간은 우리로 치면 경주와 같은 곳이다. 왕조가 형성되고 유지된 시대는 비록 차이가 날지라도 겉으로 보기에 불교왕국이었다는 점, 최초의 통일왕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두 왕조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교를 통한 나라의 위상과 발전을 도모한 면은 누가 더하다 비교하지 못할 정도이다.
바간에 한 때 6,000여 개가 넘는 불탑이 건설되었다는 것은 경주로 치면 황룡사를 비롯한 수백 개의 절이 지어졌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바간에는 아직 2,000여 개의 당시 불탑이 남아 바간왕조와 불교의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절터로 남아 그 흔적이 숨어있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경주도 남산 기슭이나 동네어귀의 어느 절터 한 군데에서 화강석 탑 너머의 해넘이를 보며 역광에 실린 옛 역사를 더듬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본질이라는 것이 바로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이다. 이것들은 비단 종교적 속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싶다. 62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와 40년이 넘는 군사정권에 의해 본의 아니게 닫혀있는 국가로 남은 미얀마와 미얀마인들. 철권 군부통치와 최빈국의 위치에 있어 기본적인 인권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나라 미얀마, 그렇기에 외부세계로부터의 문명화, 산업화라는 가치가 아직은 넘치지 않아 전통의 가치가 남아있는 나라 미얀마에는 고대 바간왕조의 미소가 남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미얀마라고 하면 그 미소를 떠올리는지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잊고 있던 우리의 미소를 더듬는다. 경주의 영묘사 터에서 발굴된 수막새에 새겨진 얼굴무늬를 보고 흔히 신라의미소라 한다. 또한 경주남산 동쪽 기슭의 감실부처를 보고 할매부처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잔잔한 미소가 우리다운 미소의 원형일 것이다. 그럼에도 빠른 세월의 흐름에 떠밀려 그런 웃음을 잃어버리고 사는지 모를 일인데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서 종교적 의미로서의 본질뿐만 아니라 비로소 사람됨의 본질을 생각하게 되었다.
양곤(Yangon)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여, 바간에 내릴 즈음 보게 되는 서로 다른 모양의 다양성을 가진 바간의 그 많은 탑들이 각각 미얀마인 한사람 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것도 역광 속에 서서 그것도 <고요함>속에 <평정심>을 가지고 환한 미소를 보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담백함>을 느끼게 하는 그 미소 말이다.
한 때 어느 나라의 융성했던 거대도시가 세월이 흘러 퇴락한 채 유물만 박제처럼 남아 옛날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도시들이 많다. 바다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남미의 잉카유적, 고구려의 토성들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직 6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바간은 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오히려 최소한의 인구가 있음으로서 고대도시의 면모를 느끼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이런 느낌은 아직도 번성한 재래시장의 한 골목어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인정어린 미소에서 느낄 수 있다. 시장 어귀로 들어서면 오전의 햇살이 점차 높게 오르며 반짝이는 역광을 쏟아내고 사람들은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마치 바간왕국 시절로부터 현재로 걸어 나오는 듯 천천히 그리고 밝은 실루엣으로 보인다. 깊은 눈동자를 가진 릭샤를 모는 남자들이 넌지시 바라보는 모습, 아무소리 없이 사라며 계란 두 개를 내미는 아낙, 내가 들이댄 카메라가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고 얼굴을 피하며 웃는 중학생 정도의 여자 아이들……. 이들 모두가 바간에서 흔히 마주치는 작은 탑 하나하나와 닮아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미얀마의 탑을 보러 가는 길은 시간적으로 내 집을 나선지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간의 작은 공항을 나와 시장구경을 한 북부지역의 나웅우마을인근에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쉐지곤파고다(Shwezigon Pagoda)를 방문하는 것으로 탑 순례가 시작되었다.
또한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의 눈으로 보면 소승불교 즉, 상좌부불교로 일컬어지는 동남아시아의 불교사원은 그 형태가 다소 이질적일 수 있다. 더러는 새나 개의 배설물을 밟을 수도 있는 더러운 맨바닥을 맨발로 걷는다는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황금모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쉐지곤파고다(Shwezigon Pagoda)를 처음으로 방문하면서 나도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런 것들에 쉬이 익숙해지는 것도 사람이다.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의 길을 걸을라치면 온갖 동물의 배설물들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들을 피하느라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게 된다. 필요하면 아무데서나 엉덩이를 내리고 볼일을 보는 사람들보다 그들을 본의 아니게 쳐다보는 우리가 민망해서 불편해한다. 어느 골목길에서 만난 한 사람에게 잠시 관심을 보이면 갑자기 많은 사란들이 모여 큰 구경거리라도 난 듯 졸졸 따라다니며 오히려 나를 관찰하는 바람에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어느 틈에 적응해 있어 별로 불편해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맨발의 사원 입장에 적응하는 데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쉐지곤 파고다는 AD1059년 아노라타왕이 건축을 시작해서 그의 아들 쟌시타(Kyanzittha)왕이 1085년에 완공한 탑이다. 부처님의 앞머리뼈와 모조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전하는 이 탑은 스리랑카로부터 불교를 먼저 받아들였던 남부 몬(Mon)족에 의한 건축양식에서 벗어나 미얀마 건축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온 최초의 건축물이다. 따라서 쉐지곤 파고다는 미얀마 전체 탑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으며 이런 이유로 ‘불탑의 어머니’라 불리기도 한다.
정방형의 기단 위에 약 50미터에 달하는 이 탑은 미얀마 불교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의 형태에도 영향을 주어 마치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이며 탑의 내부에는 빈 공간이 없이 메워져있다. 이렇게 탑 내부가 밀폐되어 들어갈 수 없게 만든 탑들을 제디양식의 탑이라 하며 탑의 내부에 불상이 모셔져있고 기도 공간이 확보된 것을 파토양식의 탑이라고 한다. 미얀마 탑의 원형이라 불리는 쉐지곤 파고다가 제디 양식인 것으로 미루어 미얀마 사람들은 흔히 불탑을 제디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미얀마에서의 불탑의 보통명칭은 ´빠야(Paya)´란 점도 밝혀둔다.
우리의 불교도 어떤 절을 가든 산신당을 비롯한 토착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미얀마 불교에는 그런 토착 신앙과의 관계가 우리보다 더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그들이 모시는 민간신앙의 대상, 즉 정령들을 일러 낫(Nat)이라 이르는데 이곳 쉐지곤 파고다에는 아노라타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37명의 낫이 안치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 쟌시타왕이 이 사원 건축의 말미에 필요한 사암을 구하러 보낸 쉐자가가 산적들을 만나 죽고 소식을 모르게 되자 그의 아버지 쉐모진이 아들의 임무를 대신하여 길을 떠났다가 또 산적에 죽임을 당하자 왕이 그 부자를 추모하여 지은 사당이 지금 낫 신앙의 대표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이곳은 미얀마 불탑의 시원이 된다는 건축학적 의미 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고 정령신앙의 본거지라는 의미로도 미얀마인들이 살아생전 꼭 오고 싶어 하는 불교성지다.
금박을 잔뜩 입힌 탑의 화려한 상부를 보면서 나는 내가 보고 느끼고자 했던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같은 것의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구복(求福)을 비는 인간의 욕망이 과하다 싶었고 바벨탑의 아슬아슬한 위험을 느끼게 될 뿐이었다.
슬슬 걸어 탑의 뒤를 도니 할머니 한 분이 잎담배를 말아 피며 나를 빠끔히 바라본다. 살점이 없는 그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은 이질적이어서 혹시 이 땅에 사는 어떤 정령이 환생한 것은 아니가 싶어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내 눈 앞에는 발우를 든 노승 한 명과 그 곁에 코를 흘리며 선 동자승 하나가 서 있다. 내가 그 사이를 빠져나가자 깡마른 할머니와 또 그만큼 마른 두 스님이 서로를 바라보는 형국이 되었다. 어쩌면 이런 대면이 미얀마의 얼굴 한 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탑을 돌아 나올 즈음 쉐지곤파고다의 북동쪽 귀퉁이에서 오래되어 낡은 탑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붉은 사암의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전형적인 미얀마의 탑은 오히려 <평정심>을 일깨우는 모습으로 다가섰다. 어쩌면 내가 찾고자 했던, 크리스틴 조디스가 발견했던 탑의 속성을 일게 되는 단서를 발견한 것 같아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런 기분은 인근 띨로민로 파고다(Htilominlo Pagoda)에서 이어졌다. 하루 종일 숲 속의 탑들 사이를 거닐다 이곳에서 맞는 해넘이를 보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해질 무렵이면 모이는 곳이다. 사암이 세월의 흐름만큼 퇴색을 하였지만 오히려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이 탑은 사람으로 치자면 나이 들수록 그 향취가 분명하고 그윽한 사람인 것이다. 해질 무렵 거대한 탑의 상륜부를 등 뒤에 두고 견고한 문에 기대어 해지는 모습을 보는 상상을 해 본다. 적막한 아름다움은 나로 하여금 고요한 평정심을 갖게 할 것이 틀림없다.
바간에 남아있는 사원 중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사원이기도 한 이 띨로민로 파고다는 통일 바간왕국 8대 왕인 나다웅먀왕(재위기간 AD1211-1234)이 AD1218년에 건립한 거대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나다웅먀왕이 왕으로 책봉되는 과정이 전설로 남은 탑이다. 나다웅먀의 아버지인 나라파티시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그는 그중 가장 막내였으나 특출했던 나다웅먀에게 왕위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섯 아들을 다 불러놓고 왕의 상징이던 흰 우산을 던져 그 끝이 향하는 곳에 있는 아들에게 왕위를 주겠노라고 하였고 결과 우산은 나다웅먀를 향해 왕이 되었다. 나머지 아들들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띨로민로는 “우산이 선택한 자, 왕이 선택한 자”라는 뜻이다.
미륵보살의 형상을 한 소조상을 뒤로 하고 실내로 들어가면 마주보이는 불상보다 천장을 장식한 정교한 무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불교 궁극의 목표인 깨달음을 향한 치열한 구언의 메시지인 듯 원형의 무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어쩌면 이슬람의 문양과도 닮아보였다. 파토형식의 이 탑 안에서 사방불(四方佛)을 친견하고 나올 즈음 이런 정밀한 무늬와 부드러움은 사원 외벽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벽 모서리마다 도깨비상을 새기고 위로 뻗어 올린 당초문을 닮은 연속무늬는 무지랭이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를 부처께 빌고 하늘에 알리는 모습 그대로다. 이런 무늬는 어쩌면 부처님 광배에 표현되는 불꽃모양과도 닮았다.
지붕첨탑으로 향하는 통일성 있는 구조도 그렇거니와 건물 외벽 이래 단에 만들어 놓은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의 돋을새김은 우리 불교의 탑에나 연화좌(蓮花座)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같은 양식인데 그 파임이 깊고 아름답다. 또한 빛이 적당히 바랜 채색은 우리 단청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색감과 닮아있었다.
내 눈이 호사를 누리는 순간인데 이는 돈황의 막고굴이나 경주나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불교문화와 공통점과 다른 점들이 이어졌다 멀어지는 모습으로 반복된다. 확연히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불두(佛頭) 하나가 누군가에 의해 외벽에 얹혀져있다. 누가 빚었으며 어디서 나와 흔들리는 영혼들을 깨우다 스스로 머리만 남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머리는 없어지고 몸만 남은 내 빈약한 영혼의 어리석음에 대해 마음으로 그 불두에 합장하여 죽비 한 대 내려쳐주기를 빌었다.
크리스틴 조디스(Christine Jordis)는 미얀마를 일컬어 <아름다운 풍경에도 슬픔이 묻어나는 땅>이라고 표현했다. 더구나 그녀가 쓴 책 "미얀마 산책"에서 미얀마인의 정신을 반영하는 불교와 그 이미지를 충실히 담고 있는 불탑의 도시 바간을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난 한 해 어지러운 성정과 불가피하게 맞은 육체적인 고통들을 순한 마음으로 담아내고 또 추슬러 보려는 본능에 이끌려 한파가 한참인 때 미얀마로 짧은 마실을 다녀왔다. 출발부터 다녀온 지금까지 나도 조디스처럼 미얀마에서, 바간에서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을 느끼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 바간의 하오 풍경 하나 ⓒ 들찔레 |
이렇게 평정한 마음으로 고요함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삶의 담백한 맛에 대한 소망은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구체적이며 나아가 집요하기까지 한 내면의 나를 만나게 한다. 그만큼 삶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수동적으로 변하고 약해져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해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좋게 말하면 삶의 한 단면들을 마주칠 때마다 조금은 신중해졌다고 볼 수 있으며 나를 둘러싼 세상과 신에 대한 경외감을 무의식 속에서도 조금씩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간은 오래된 도시다. 여러 민족들이 각 지역별로 군웅할거 하던 미얀마에서 이곳 바간에 9세기경 파인바라는 부족장이 12개의 성문으로 된 전성(塼城)을 구축하면서 바간왕국을 세웠고 42대 아노라타(Anawrahta, 재위기간 AD 1044-1077)왕이 1054년에 최초로 미얀마 전역을 하나의 통일된 왕조(AD 1044-1278)로 만든다. 따라서 아노라타 왕을 미얀마 초대왕조의 태조로 기록하고 있다. 이미 부분적으로 불교의 유입이 있었으나 AD403년 소승불교가 남부 탈론(Thalon)왕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아노라타왕 시대에 소승불교의 급격한 전파가 이루어진다. 또한 아노라타 왕은 나라의 통합을 위한 정신적인 젖줄과 왕권유지의 수단 두 측면을 고려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발전시키는데 주력한다.
◇ 고대 미얀마인의 모습 ⓒ 들찔레 |
바간은 우리로 치면 경주와 같은 곳이다. 왕조가 형성되고 유지된 시대는 비록 차이가 날지라도 겉으로 보기에 불교왕국이었다는 점, 최초의 통일왕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두 왕조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교를 통한 나라의 위상과 발전을 도모한 면은 누가 더하다 비교하지 못할 정도이다.
바간에 한 때 6,000여 개가 넘는 불탑이 건설되었다는 것은 경주로 치면 황룡사를 비롯한 수백 개의 절이 지어졌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바간에는 아직 2,000여 개의 당시 불탑이 남아 바간왕조와 불교의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절터로 남아 그 흔적이 숨어있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경주도 남산 기슭이나 동네어귀의 어느 절터 한 군데에서 화강석 탑 너머의 해넘이를 보며 역광에 실린 옛 역사를 더듬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 미얀마 아이의 선한 얼굴과 옅은 미소 ⓒ 들찔레 |
그 본질이라는 것이 바로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이다. 이것들은 비단 종교적 속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싶다. 62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와 40년이 넘는 군사정권에 의해 본의 아니게 닫혀있는 국가로 남은 미얀마와 미얀마인들. 철권 군부통치와 최빈국의 위치에 있어 기본적인 인권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나라 미얀마, 그렇기에 외부세계로부터의 문명화, 산업화라는 가치가 아직은 넘치지 않아 전통의 가치가 남아있는 나라 미얀마에는 고대 바간왕조의 미소가 남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미얀마라고 하면 그 미소를 떠올리는지 모른다.
◇ 미얀마 인형극의 주인공들, 정령들의 얼굴이자 미얀마인들의 얼굴모습이다 ⓒ 들찔레 |
나는 이곳에서 잊고 있던 우리의 미소를 더듬는다. 경주의 영묘사 터에서 발굴된 수막새에 새겨진 얼굴무늬를 보고 흔히 신라의미소라 한다. 또한 경주남산 동쪽 기슭의 감실부처를 보고 할매부처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잔잔한 미소가 우리다운 미소의 원형일 것이다. 그럼에도 빠른 세월의 흐름에 떠밀려 그런 웃음을 잃어버리고 사는지 모를 일인데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서 종교적 의미로서의 본질뿐만 아니라 비로소 사람됨의 본질을 생각하게 되었다.
◇ 바간의 장터 입구에서 ⓒ 들찔레 |
양곤(Yangon)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여, 바간에 내릴 즈음 보게 되는 서로 다른 모양의 다양성을 가진 바간의 그 많은 탑들이 각각 미얀마인 한사람 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것도 역광 속에 서서 그것도 <고요함>속에 <평정심>을 가지고 환한 미소를 보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담백함>을 느끼게 하는 그 미소 말이다.
한 때 어느 나라의 융성했던 거대도시가 세월이 흘러 퇴락한 채 유물만 박제처럼 남아 옛날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도시들이 많다. 바다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남미의 잉카유적, 고구려의 토성들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직 6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바간은 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오히려 최소한의 인구가 있음으로서 고대도시의 면모를 느끼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 릭샤를 끄는 사람들 ⓒ 들찔레 |
이런 느낌은 아직도 번성한 재래시장의 한 골목어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인정어린 미소에서 느낄 수 있다. 시장 어귀로 들어서면 오전의 햇살이 점차 높게 오르며 반짝이는 역광을 쏟아내고 사람들은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마치 바간왕국 시절로부터 현재로 걸어 나오는 듯 천천히 그리고 밝은 실루엣으로 보인다. 깊은 눈동자를 가진 릭샤를 모는 남자들이 넌지시 바라보는 모습, 아무소리 없이 사라며 계란 두 개를 내미는 아낙, 내가 들이댄 카메라가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고 얼굴을 피하며 웃는 중학생 정도의 여자 아이들……. 이들 모두가 바간에서 흔히 마주치는 작은 탑 하나하나와 닮아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미얀마의 탑을 보러 가는 길은 시간적으로 내 집을 나선지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간의 작은 공항을 나와 시장구경을 한 북부지역의 나웅우마을인근에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쉐지곤파고다(Shwezigon Pagoda)를 방문하는 것으로 탑 순례가 시작되었다.
또한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의 눈으로 보면 소승불교 즉, 상좌부불교로 일컬어지는 동남아시아의 불교사원은 그 형태가 다소 이질적일 수 있다. 더러는 새나 개의 배설물을 밟을 수도 있는 더러운 맨바닥을 맨발로 걷는다는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황금모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쉐지곤파고다(Shwezigon Pagoda)를 처음으로 방문하면서 나도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 해 질 무렵의 바간 ⓒ 들찔레 |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런 것들에 쉬이 익숙해지는 것도 사람이다.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의 길을 걸을라치면 온갖 동물의 배설물들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들을 피하느라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게 된다. 필요하면 아무데서나 엉덩이를 내리고 볼일을 보는 사람들보다 그들을 본의 아니게 쳐다보는 우리가 민망해서 불편해한다. 어느 골목길에서 만난 한 사람에게 잠시 관심을 보이면 갑자기 많은 사란들이 모여 큰 구경거리라도 난 듯 졸졸 따라다니며 오히려 나를 관찰하는 바람에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어느 틈에 적응해 있어 별로 불편해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맨발의 사원 입장에 적응하는 데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쉐지곤 파고다는 AD1059년 아노라타왕이 건축을 시작해서 그의 아들 쟌시타(Kyanzittha)왕이 1085년에 완공한 탑이다. 부처님의 앞머리뼈와 모조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전하는 이 탑은 스리랑카로부터 불교를 먼저 받아들였던 남부 몬(Mon)족에 의한 건축양식에서 벗어나 미얀마 건축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온 최초의 건축물이다. 따라서 쉐지곤 파고다는 미얀마 전체 탑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으며 이런 이유로 ‘불탑의 어머니’라 불리기도 한다.
◇ 쉐지곤 파고다 전경 ⓒ 들찔레 |
정방형의 기단 위에 약 50미터에 달하는 이 탑은 미얀마 불교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의 형태에도 영향을 주어 마치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이며 탑의 내부에는 빈 공간이 없이 메워져있다. 이렇게 탑 내부가 밀폐되어 들어갈 수 없게 만든 탑들을 제디양식의 탑이라 하며 탑의 내부에 불상이 모셔져있고 기도 공간이 확보된 것을 파토양식의 탑이라고 한다. 미얀마 탑의 원형이라 불리는 쉐지곤 파고다가 제디 양식인 것으로 미루어 미얀마 사람들은 흔히 불탑을 제디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미얀마에서의 불탑의 보통명칭은 ´빠야(Paya)´란 점도 밝혀둔다.
우리의 불교도 어떤 절을 가든 산신당을 비롯한 토착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미얀마 불교에는 그런 토착 신앙과의 관계가 우리보다 더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그들이 모시는 민간신앙의 대상, 즉 정령들을 일러 낫(Nat)이라 이르는데 이곳 쉐지곤 파고다에는 아노라타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37명의 낫이 안치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 토속적인 낫(Nat) 신앙의 흔적들, 쉐모진(위)과 쉐자가(아래) ⓒ 들찔레 |
그 중 쟌시타왕이 이 사원 건축의 말미에 필요한 사암을 구하러 보낸 쉐자가가 산적들을 만나 죽고 소식을 모르게 되자 그의 아버지 쉐모진이 아들의 임무를 대신하여 길을 떠났다가 또 산적에 죽임을 당하자 왕이 그 부자를 추모하여 지은 사당이 지금 낫 신앙의 대표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이곳은 미얀마 불탑의 시원이 된다는 건축학적 의미 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고 정령신앙의 본거지라는 의미로도 미얀마인들이 살아생전 꼭 오고 싶어 하는 불교성지다.
금박을 잔뜩 입힌 탑의 화려한 상부를 보면서 나는 내가 보고 느끼고자 했던 <고요함>, <평정심>, <담백함>같은 것의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구복(求福)을 비는 인간의 욕망이 과하다 싶었고 바벨탑의 아슬아슬한 위험을 느끼게 될 뿐이었다.
◇ 사원 마당에 정물처럼 앉아 담배를 피는 할머니 ⓒ 들찔레 |
슬슬 걸어 탑의 뒤를 도니 할머니 한 분이 잎담배를 말아 피며 나를 빠끔히 바라본다. 살점이 없는 그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은 이질적이어서 혹시 이 땅에 사는 어떤 정령이 환생한 것은 아니가 싶어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내 눈 앞에는 발우를 든 노승 한 명과 그 곁에 코를 흘리며 선 동자승 하나가 서 있다. 내가 그 사이를 빠져나가자 깡마른 할머니와 또 그만큼 마른 두 스님이 서로를 바라보는 형국이 되었다. 어쩌면 이런 대면이 미얀마의 얼굴 한 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탑을 돌아 나올 즈음 쉐지곤파고다의 북동쪽 귀퉁이에서 오래되어 낡은 탑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붉은 사암의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전형적인 미얀마의 탑은 오히려 <평정심>을 일깨우는 모습으로 다가섰다. 어쩌면 내가 찾고자 했던, 크리스틴 조디스가 발견했던 탑의 속성을 일게 되는 단서를 발견한 것 같아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 쉐지곤 파고다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오래된 탑 하나 ⓒ 들찔레 |
이런 기분은 인근 띨로민로 파고다(Htilominlo Pagoda)에서 이어졌다. 하루 종일 숲 속의 탑들 사이를 거닐다 이곳에서 맞는 해넘이를 보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해질 무렵이면 모이는 곳이다. 사암이 세월의 흐름만큼 퇴색을 하였지만 오히려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이 탑은 사람으로 치자면 나이 들수록 그 향취가 분명하고 그윽한 사람인 것이다. 해질 무렵 거대한 탑의 상륜부를 등 뒤에 두고 견고한 문에 기대어 해지는 모습을 보는 상상을 해 본다. 적막한 아름다움은 나로 하여금 고요한 평정심을 갖게 할 것이 틀림없다.
◇ 띨로민로 파고다 외관 ⓒ 들찔레 |
바간에 남아있는 사원 중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사원이기도 한 이 띨로민로 파고다는 통일 바간왕국 8대 왕인 나다웅먀왕(재위기간 AD1211-1234)이 AD1218년에 건립한 거대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나다웅먀왕이 왕으로 책봉되는 과정이 전설로 남은 탑이다. 나다웅먀의 아버지인 나라파티시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그는 그중 가장 막내였으나 특출했던 나다웅먀에게 왕위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섯 아들을 다 불러놓고 왕의 상징이던 흰 우산을 던져 그 끝이 향하는 곳에 있는 아들에게 왕위를 주겠노라고 하였고 결과 우산은 나다웅먀를 향해 왕이 되었다. 나머지 아들들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띨로민로는 “우산이 선택한 자, 왕이 선택한 자”라는 뜻이다.
◇ 띨로민로 파고다 천장무늬 ⓒ 들찔레 |
미륵보살의 형상을 한 소조상을 뒤로 하고 실내로 들어가면 마주보이는 불상보다 천장을 장식한 정교한 무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불교 궁극의 목표인 깨달음을 향한 치열한 구언의 메시지인 듯 원형의 무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어쩌면 이슬람의 문양과도 닮아보였다. 파토형식의 이 탑 안에서 사방불(四方佛)을 친견하고 나올 즈음 이런 정밀한 무늬와 부드러움은 사원 외벽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띨로민로 파고다 외벽, 도깨비 무늬가 정교하다 ⓒ 들찔레 |
벽 모서리마다 도깨비상을 새기고 위로 뻗어 올린 당초문을 닮은 연속무늬는 무지랭이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를 부처께 빌고 하늘에 알리는 모습 그대로다. 이런 무늬는 어쩌면 부처님 광배에 표현되는 불꽃모양과도 닮았다.
◇ 띨로민로 파고다 외벽, 정교한 복련 장식과 수수한 채색을 한 벽돌 ⓒ 들찔레 |
지붕첨탑으로 향하는 통일성 있는 구조도 그렇거니와 건물 외벽 이래 단에 만들어 놓은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의 돋을새김은 우리 불교의 탑에나 연화좌(蓮花座)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같은 양식인데 그 파임이 깊고 아름답다. 또한 빛이 적당히 바랜 채색은 우리 단청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색감과 닮아있었다.
◇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두 하나 외진 벽위에 놓여있다 ⓒ 들찔레 |
내 눈이 호사를 누리는 순간인데 이는 돈황의 막고굴이나 경주나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불교문화와 공통점과 다른 점들이 이어졌다 멀어지는 모습으로 반복된다. 확연히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불두(佛頭) 하나가 누군가에 의해 외벽에 얹혀져있다. 누가 빚었으며 어디서 나와 흔들리는 영혼들을 깨우다 스스로 머리만 남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머리는 없어지고 몸만 남은 내 빈약한 영혼의 어리석음에 대해 마음으로 그 불두에 합장하여 죽비 한 대 내려쳐주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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