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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짧은 마실의 기억 - II
바간의 수많은 탑들을 모두 돌아본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더구나 짧은 일정 중 하루 이틀에 걸쳐 보는 탑 순례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규모가 크거나 의미가 깊은 곳 ,혹은 아름다운 탑 몇 곳을 둘러보며 가능한 그 깊은 맛을 느끼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북쪽 바간을 지나 옛 왕국의 성이 있던 올드 바간(Old Bagan)인근으로 이동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사원이 아난다(Ananda) 사원이다. 이 사원은 미얀마 그 낳은 탑들 중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아래공간을 이룬 하얀 벽과 탑의 상륜부에 해당하는 황금빛 첨탑의 조화는 한낮으로 가는 시간에도 두드러졌다. 이 사원은 아름다운 외형과 더불어 완벽한 비율을 적용한 구조로 바간 건축양식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원으로 평가 받는 곳이다.
유리궁의 연대기에 의하면 어느 날 8명의 성자가 쟌시타왕을 찾아온다. 독실한 불교신자이던 왕은 그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열락(悅樂)의 땅이라 일컬어지는 간다마다나에서 왔음을 듣게 되고 그들이 머문 3개월 간 수도원을 열어주고 자주 왕궁에 초청하였다. 어느 날 쟌시타왕이 성자들에게 간다마다나에 있는 난다몰라 동굴을 보고 싶다고 하자 성자들은 그들의 신통력으로 동굴을 가져왔고 쟌시타왕은 그 동굴을 규범 삼아 난다라는 사원을 건축하였다. 이 사원이 19세기부터 아난다사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이 사원은 각 변의 길이가 52m인 정사각형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으며 각 방향의 문에 각각 18m에 이르는 돌출현관인 주랑이 설치되어 위에서 보면 ‘十‘자 모양이다. 사원 내부에는 각 방향에 사방불을 모셔 놓았는데 동쪽의 코나가마니불(구니함모니불), 서쪽의 고타마불(석가모니불), 남쪽의 카사파불(가섭불), 북쪽의 카쿠산다불(구류손불)이 그것들이며 모두 서 있는 입불상(立佛像)이다.
이 입불상들은 멀리서 보면 인자한 얼굴과 표정인데 가까이로 갈수록 굳은 표정에 무서운 얼굴로 보인다. 사람들이 서서 위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왕이나 귀족은 불상 가까이서 기도를 하고 평민은 뒤에서 기도를 하도록 출입문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들어 다른 해석들을 하기도 한다. 앞자리에 앉은 왕과 귀족들에게는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이끌어야 할 의무를 들어 근엄한 표정을 보여 늘 경계할 것을 각성시키는 뜻이고 멀리에 앉은 백성들에게는 부처님이 늘 인자한 모습으로 백성들을 감싸 안는 존재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딴은 그렇다.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백성의 가슴에 남은 절대자, 부처님의 모습은 인자함이다. 특히 관세음보살은 늘 온화한 미소로 어지나 고통 받는 백성의 위안이 되었고 비로자나불은 사방천지 희망의 빛을 내뿜어 뭇 사람들의 삶 앞을 밝혀준 것이라면 이곳 아난다사원의 석불들 또한 백성들 앞에서의 모습은 우리 불교의 부처님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런 바람과 소망은 아난다사원의 배부 벽마다 감실을 파고 각종 부처님을 기원을 담아 안치해 놓았다. 비록 서양 열강들의 더러운 손의 의해 많이 강탈되긴 하였으나 소박한 민중을 닮은 모습으로 남은 불상들을 어둠 속에서 하나씩 찾아보는 일 또한 <고요함>속에 <평정심>을 갖게 해주는 힘이 있는 행위임을 알게 되었다.
바간이 불교왕국의 도읍지라는 이유로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겠지만 결국 사람이 살아야 종교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바간을 가로지르는 총 연장 2090Km의 이라와디(Irrawaddy)강은 사람이 터를 잡고 살게 만드는 바간의 젖줄이다. 이 강은 양곤에서 합수되어 바다로 흘러드는 미얀마의 젖줄이기도하다. 강과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사람과 문명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눈에 보이는 경외의 대상이고 그 자체로 종교이다.
그러나 올드 바간에 들어와 이라와디 강가에 서도 옛 왕조의 번영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햇살에 대비되어 어두운 빛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강 너머 몇몇 탑을 제외하면 퇴락한 옛 도시의 강가에는 나무그늘 뒤로 몸을 숨겨 목욕을 하는 아낙 하나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간이식당, 나무를 실어 나르는 두어 척의 배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현재 최빈국 중의 하나인 미얀마이기에 옛 영화의 흔적을 더듬는 것으로 오히려 더 슬픈 감정이 느껴지는 것인지 모른다.
세월은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강가에서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탑 하나가 서기 300년에 조성되어 바간에서 가장 오래 된 사원인 부파야(Bupaya)다. 황금빛의 이 탑은 마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종형 부도양식을 닮았고 과장되게 크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편안하게 만든다. 더구나 강 풍경을 같이 조망할 수 있다는 자연적인 환경이 그런 편안한 감정을 더해 주는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탑은 옛날부터 이 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던 뱃길에 등대로서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종교라는 것이 인생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현실에서 불탑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 즉 뱃사람들의 안위를 살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수긍을 하게 된다. 이런 불교적 기능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해안가 산 이름이 미륵봉 이라든지 산길 모퉁이에 서 있는 마애불 같은 것도 부파야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부파야의 ‘부(Bu)´는 호리병에서 유래한 말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최초의 미얀마족 왕이라고 불리는 타모다릿(Tamodarit)이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할 때 거대한 새와 호랑이, 멧돼지, 다람쥐 그리고 생명력이 강한 식물인 호리병박(수세미)이 다섯 가지가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호리병박은 전국토로 뻗어나가 땅을 덮었다. 이때 태양족의 왕자인 퓨소티(Pyusawhti)가 바간에 와서 사카(인드라)의 활을 들어 이 다섯 가지를 제거하고 바간의 공주와 결혼했다. 나중에 퓨소티가 바간의 왕이 된 후 다섯 가지의 재앙을 물리친 자리마다 탑을 세웠는데 호리병 모양의 부파야는 수세미 식물인 호리병박을 물리친 자리에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탑돌이를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더위를 식히며 점심식사를 하는 것은 휴식이자 숨고르기의 일환이다. 잘 꾸며진 식당의 여외에서 점심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풍경 중에는 부겐베리아가 붉은 꽃을 피운 모습이 있다. 가난한 나라이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겐베리아는 풍성한 모습이어서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는 요소라는 느낌이 든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오월이 되면 보릿고개로 배가 고프던 시절 꽃이 밥으로 보였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하얀 이팝나무 꽃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꽃바람에 잠시 눈을 팔고 있을 즈음 식당에서 잠시 마리오네트 공연이 있었다. 타이나 캄보디아에서는 인형을 이용해 그림자 춤을 추는 것을 보여주는 전통이 있듯이 미얀마에는 정교하게 만든 마리오네트 인형을 가지고 전통 춤 공연을 하는 것이 계승되어왔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마리오네트의 시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18세기 꽁바웅왕조에 발전을 거듭해 18세기 말에 가장 정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마리오네트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마리오네트의 주 내용은 신화나 전설, 왕조의 창건설화 등이 있으며 더하여 나라의 실상을 왕에게 전할 때 말로하지 않고 연극의 형태를 빌어 마리오네트 공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때로는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니 현재 군사정부에서 이런 형태의 마리오네트를 그냥둘리 없고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명맥유지만 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정교하게 관절을 움직이고 표정을 바꾸며 춤을 추는 인형들과 그것들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웠다.
그런가하면 미얀마를 떠나와도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을 사원이 있으니 바로 마누하(Manuha)사원이 그것이다. 탑과 사원이 가지는 예술성이나 건축미를 기대할 수 없는 이 사원이 유명한 이유는 안치된 불상에 비해 그를 둘러싼 건물이 워낙 협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상의 얼굴을 보려면 가까이 다가서서 위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또한 다른 불상을 보려면 들어가는 입구가 불상과 벽 사이의 아주 좁은 틈으로 이루어져 있어 몸을 빗겨 들어가야 한다. 이 좁은 공간은 마주 오는 두 사람이 서로 피해서 지나갈 수 없는 작은 틈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몸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까지 불편해진다.
마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사원은 미얀마 남부 타톤지역의 왕이었던 마누하가 건립한 사원으로 매우 독특한 사연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바간보다 불교가 융성했던 남부의 왕이었던 마누하가 아노라타 왕이 요구한 불경 사본을 주지 않고 버티다 포로가 되어 잡혀와 지내며 온갖 설득을 받게 된다. 마침내 바간에 상좌부 불교전파에 힘이 될 것을 약속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몬족 양식으로 조성한 사원이 바로 마누하사원이다.
비록 마누하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며 아노라타 왕에게 협력을 하였지만 감옥에서 풀려나도 자신이 감옥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이 사원을 지은 것이다. 따라서 사원 안의 불상들도 마치 마누하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사방 벽에 꽉 죄이도록 배치하였고 그 표정도 우울해 보인다. 그 사원이 조성되고 불상까지 안치한 후 마누하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다음 생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던, 다른 사람에게 정복당하지 않게 해주시길!”
마누하사원 바로 왼편 뒤에 난파야(Nanpaya)라고 하는 자그만 한 탑이 있는데 이곳이 마누하의 감옥으로 쓰인 곳이라 추정한다. 규모가 크지 않으나 외벽에 돌을 덧씌워 건설한 두개 밖에 안 되는 사원 중의 하나이고 보기 드물게 사암에 조각된 훌륭한 조각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내부에는 중앙 기둥이 없이 두터운 바깥의 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하도록 만든 ‘안이 비어있는 사각형 구조’의 건축양식을 보인다. 비어있는 공간의 중심에는 좌대가 남아있어 한 때 불상이 안치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난파야에서 볼 수 있는 압권은 기둥 안쪽 두 면에 새겨진 부조다. 힌두교의 일부가 나중에 불교로 유입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팔부중도 사실은 힌두교의 신들이 불교로 유입된 것이며 제석천으로 알려진 인드라나 범천으로 알려진 브라흐마도 같은 이치로 불교에 유입된 것들이다. 이 벽면에는 4개의 브라마흐가 세련된 기법으로 조각되어 있다. 어둠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이 부조가 작은 불빛을 받자 확연히 도드라져 보이는데 미얀마에서 본 조각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기억한다.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오른쪽 무릎을 살짝 든 브라마흐는 양손에 연꽃을 들고 중앙에 있던 부처님에게 헌화하며 예를 취하는 모습이다. 브라마흐가 부처님의 권속이 된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현장이다. 이 부조들은 채색이 되지 않아 오히려 더 귀하게 여겨지고 단단한 돌에 새긴 돋을새김의 수법이 뛰어나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힌두교의 정체성이 녹아있는 소박한 규모의 불교 사원 난파야는 늘 마음속에 크고 위대한 것에 대한 동경심만 키우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원이다. 다만 그런 느낌을 느끼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의 마음이 겸손한 가운데 담백하여야 할 것이다.
돌아 나오는 길, 앳된 여자아이들이 다가와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며 우르르 물려온다. 보잘것없는 기념품들을 들고 다니며 사라고 권유하다가 관심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준다. 이른바 한류열풍이 이곳까지 번져 우리나라 연예인들의 사진이 줄줄이 나온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 연예인을 아느냐고? 본적이 있냐고? 아무리 군사정권의 압박 속에 있어도 이런 문화적인 흐름까지는 막지 못하는지 몇 개 밖에 없는 TV채널 중에 두 개가 한국 TV이며 계속해서 우리 드라마를 보여주고 한글교실까지 인기라고 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간단한 한국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으나 너무나 정확한 억양에 이후로도 자주 놀라게 되었다.
난파야와 마누하사원 사이 길로 돌아 나오는데 작은 명상소가 꾸며져 있다. 이 공간에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는 마누하왕과 왕비인 그의 아내 형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표정이 밝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왕비는 마누하왕을 외면하고 있다. 이유는 마누하가 결국 아노라타 왕에게 협력을 한 것에 대해 왕비가 질책을 하는 장면이다. 실제 마누하왕의 왕비는 죽을 때까지 노비로 살면서 끝까지 바간에 대해 대항하였다고 한다. 뜬금없이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는 아웅산수치 생각이 났다.
바간의 수많은 탑들을 모두 돌아본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더구나 짧은 일정 중 하루 이틀에 걸쳐 보는 탑 순례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규모가 크거나 의미가 깊은 곳 ,혹은 아름다운 탑 몇 곳을 둘러보며 가능한 그 깊은 맛을 느끼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 바간의 풍경 ⓒ 들찔레 |
북쪽 바간을 지나 옛 왕국의 성이 있던 올드 바간(Old Bagan)인근으로 이동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사원이 아난다(Ananda) 사원이다. 이 사원은 미얀마 그 낳은 탑들 중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아래공간을 이룬 하얀 벽과 탑의 상륜부에 해당하는 황금빛 첨탑의 조화는 한낮으로 가는 시간에도 두드러졌다. 이 사원은 아름다운 외형과 더불어 완벽한 비율을 적용한 구조로 바간 건축양식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원으로 평가 받는 곳이다.
◇ 아난다사원 외관 ⓒ 들찔레 |
유리궁의 연대기에 의하면 어느 날 8명의 성자가 쟌시타왕을 찾아온다. 독실한 불교신자이던 왕은 그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열락(悅樂)의 땅이라 일컬어지는 간다마다나에서 왔음을 듣게 되고 그들이 머문 3개월 간 수도원을 열어주고 자주 왕궁에 초청하였다. 어느 날 쟌시타왕이 성자들에게 간다마다나에 있는 난다몰라 동굴을 보고 싶다고 하자 성자들은 그들의 신통력으로 동굴을 가져왔고 쟌시타왕은 그 동굴을 규범 삼아 난다라는 사원을 건축하였다. 이 사원이 19세기부터 아난다사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이 사원은 각 변의 길이가 52m인 정사각형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으며 각 방향의 문에 각각 18m에 이르는 돌출현관인 주랑이 설치되어 위에서 보면 ‘十‘자 모양이다. 사원 내부에는 각 방향에 사방불을 모셔 놓았는데 동쪽의 코나가마니불(구니함모니불), 서쪽의 고타마불(석가모니불), 남쪽의 카사파불(가섭불), 북쪽의 카쿠산다불(구류손불)이 그것들이며 모두 서 있는 입불상(立佛像)이다.
◇ 아난다 사원의 불상, 멀리서 보는 표정이 인자하다 ⓒ 들찔레 |
이 입불상들은 멀리서 보면 인자한 얼굴과 표정인데 가까이로 갈수록 굳은 표정에 무서운 얼굴로 보인다. 사람들이 서서 위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왕이나 귀족은 불상 가까이서 기도를 하고 평민은 뒤에서 기도를 하도록 출입문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들어 다른 해석들을 하기도 한다. 앞자리에 앉은 왕과 귀족들에게는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이끌어야 할 의무를 들어 근엄한 표정을 보여 늘 경계할 것을 각성시키는 뜻이고 멀리에 앉은 백성들에게는 부처님이 늘 인자한 모습으로 백성들을 감싸 안는 존재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딴은 그렇다.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백성의 가슴에 남은 절대자, 부처님의 모습은 인자함이다. 특히 관세음보살은 늘 온화한 미소로 어지나 고통 받는 백성의 위안이 되었고 비로자나불은 사방천지 희망의 빛을 내뿜어 뭇 사람들의 삶 앞을 밝혀준 것이라면 이곳 아난다사원의 석불들 또한 백성들 앞에서의 모습은 우리 불교의 부처님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 아난다 사원의 벽에 설치된 작은 감실들과 불상들 ⓒ 들찔레 |
그런 바람과 소망은 아난다사원의 배부 벽마다 감실을 파고 각종 부처님을 기원을 담아 안치해 놓았다. 비록 서양 열강들의 더러운 손의 의해 많이 강탈되긴 하였으나 소박한 민중을 닮은 모습으로 남은 불상들을 어둠 속에서 하나씩 찾아보는 일 또한 <고요함>속에 <평정심>을 갖게 해주는 힘이 있는 행위임을 알게 되었다.
바간이 불교왕국의 도읍지라는 이유로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겠지만 결국 사람이 살아야 종교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바간을 가로지르는 총 연장 2090Km의 이라와디(Irrawaddy)강은 사람이 터를 잡고 살게 만드는 바간의 젖줄이다. 이 강은 양곤에서 합수되어 바다로 흘러드는 미얀마의 젖줄이기도하다. 강과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사람과 문명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눈에 보이는 경외의 대상이고 그 자체로 종교이다.
◇ 부파야 인근 이라와디 강 풍경 ⓒ 들찔레 |
그러나 올드 바간에 들어와 이라와디 강가에 서도 옛 왕조의 번영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햇살에 대비되어 어두운 빛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강 너머 몇몇 탑을 제외하면 퇴락한 옛 도시의 강가에는 나무그늘 뒤로 몸을 숨겨 목욕을 하는 아낙 하나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간이식당, 나무를 실어 나르는 두어 척의 배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현재 최빈국 중의 하나인 미얀마이기에 옛 영화의 흔적을 더듬는 것으로 오히려 더 슬픈 감정이 느껴지는 것인지 모른다.
세월은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강가에서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탑 하나가 서기 300년에 조성되어 바간에서 가장 오래 된 사원인 부파야(Bupaya)다. 황금빛의 이 탑은 마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종형 부도양식을 닮았고 과장되게 크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편안하게 만든다. 더구나 강 풍경을 같이 조망할 수 있다는 자연적인 환경이 그런 편안한 감정을 더해 주는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 가장 오래된 탑 부파야 ⓒ 들찔레 |
이 탑은 옛날부터 이 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던 뱃길에 등대로서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종교라는 것이 인생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현실에서 불탑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 즉 뱃사람들의 안위를 살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수긍을 하게 된다. 이런 불교적 기능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해안가 산 이름이 미륵봉 이라든지 산길 모퉁이에 서 있는 마애불 같은 것도 부파야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 사원 유리기둥에 비친 부파야 ⓒ 들찔레 |
부파야의 ‘부(Bu)´는 호리병에서 유래한 말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최초의 미얀마족 왕이라고 불리는 타모다릿(Tamodarit)이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할 때 거대한 새와 호랑이, 멧돼지, 다람쥐 그리고 생명력이 강한 식물인 호리병박(수세미)이 다섯 가지가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호리병박은 전국토로 뻗어나가 땅을 덮었다. 이때 태양족의 왕자인 퓨소티(Pyusawhti)가 바간에 와서 사카(인드라)의 활을 들어 이 다섯 가지를 제거하고 바간의 공주와 결혼했다. 나중에 퓨소티가 바간의 왕이 된 후 다섯 가지의 재앙을 물리친 자리마다 탑을 세웠는데 호리병 모양의 부파야는 수세미 식물인 호리병박을 물리친 자리에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탑돌이를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더위를 식히며 점심식사를 하는 것은 휴식이자 숨고르기의 일환이다. 잘 꾸며진 식당의 여외에서 점심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풍경 중에는 부겐베리아가 붉은 꽃을 피운 모습이 있다. 가난한 나라이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겐베리아는 풍성한 모습이어서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는 요소라는 느낌이 든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오월이 되면 보릿고개로 배가 고프던 시절 꽃이 밥으로 보였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하얀 이팝나무 꽃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 미얀마 전통 마리오네트 공연 ⓒ 들찔레 |
꽃바람에 잠시 눈을 팔고 있을 즈음 식당에서 잠시 마리오네트 공연이 있었다. 타이나 캄보디아에서는 인형을 이용해 그림자 춤을 추는 것을 보여주는 전통이 있듯이 미얀마에는 정교하게 만든 마리오네트 인형을 가지고 전통 춤 공연을 하는 것이 계승되어왔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마리오네트의 시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18세기 꽁바웅왕조에 발전을 거듭해 18세기 말에 가장 정점에 있었다고 한다.
◇ 공연에 사용되는 마리오네트들 ⓒ 들찔레 |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마리오네트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마리오네트의 주 내용은 신화나 전설, 왕조의 창건설화 등이 있으며 더하여 나라의 실상을 왕에게 전할 때 말로하지 않고 연극의 형태를 빌어 마리오네트 공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때로는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니 현재 군사정부에서 이런 형태의 마리오네트를 그냥둘리 없고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명맥유지만 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정교하게 관절을 움직이고 표정을 바꾸며 춤을 추는 인형들과 그것들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웠다.
그런가하면 미얀마를 떠나와도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을 사원이 있으니 바로 마누하(Manuha)사원이 그것이다. 탑과 사원이 가지는 예술성이나 건축미를 기대할 수 없는 이 사원이 유명한 이유는 안치된 불상에 비해 그를 둘러싼 건물이 워낙 협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상의 얼굴을 보려면 가까이 다가서서 위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또한 다른 불상을 보려면 들어가는 입구가 불상과 벽 사이의 아주 좁은 틈으로 이루어져 있어 몸을 빗겨 들어가야 한다. 이 좁은 공간은 마주 오는 두 사람이 서로 피해서 지나갈 수 없는 작은 틈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몸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까지 불편해진다.
◇ 마누하 사원, 공간을 꽉 채운 불상의 모습 ⓒ 들찔레 |
마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사원은 미얀마 남부 타톤지역의 왕이었던 마누하가 건립한 사원으로 매우 독특한 사연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바간보다 불교가 융성했던 남부의 왕이었던 마누하가 아노라타 왕이 요구한 불경 사본을 주지 않고 버티다 포로가 되어 잡혀와 지내며 온갖 설득을 받게 된다. 마침내 바간에 상좌부 불교전파에 힘이 될 것을 약속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몬족 양식으로 조성한 사원이 바로 마누하사원이다.
비록 마누하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며 아노라타 왕에게 협력을 하였지만 감옥에서 풀려나도 자신이 감옥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이 사원을 지은 것이다. 따라서 사원 안의 불상들도 마치 마누하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사방 벽에 꽉 죄이도록 배치하였고 그 표정도 우울해 보인다. 그 사원이 조성되고 불상까지 안치한 후 마누하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다음 생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던, 다른 사람에게 정복당하지 않게 해주시길!”
마누하사원 바로 왼편 뒤에 난파야(Nanpaya)라고 하는 자그만 한 탑이 있는데 이곳이 마누하의 감옥으로 쓰인 곳이라 추정한다. 규모가 크지 않으나 외벽에 돌을 덧씌워 건설한 두개 밖에 안 되는 사원 중의 하나이고 보기 드물게 사암에 조각된 훌륭한 조각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내부에는 중앙 기둥이 없이 두터운 바깥의 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하도록 만든 ‘안이 비어있는 사각형 구조’의 건축양식을 보인다. 비어있는 공간의 중심에는 좌대가 남아있어 한 때 불상이 안치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난파야에 부조된 브라마흐 조상 ⓒ 들찔레 |
그러나 난파야에서 볼 수 있는 압권은 기둥 안쪽 두 면에 새겨진 부조다. 힌두교의 일부가 나중에 불교로 유입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팔부중도 사실은 힌두교의 신들이 불교로 유입된 것이며 제석천으로 알려진 인드라나 범천으로 알려진 브라흐마도 같은 이치로 불교에 유입된 것들이다. 이 벽면에는 4개의 브라마흐가 세련된 기법으로 조각되어 있다. 어둠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이 부조가 작은 불빛을 받자 확연히 도드라져 보이는데 미얀마에서 본 조각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기억한다.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오른쪽 무릎을 살짝 든 브라마흐는 양손에 연꽃을 들고 중앙에 있던 부처님에게 헌화하며 예를 취하는 모습이다. 브라마흐가 부처님의 권속이 된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현장이다. 이 부조들은 채색이 되지 않아 오히려 더 귀하게 여겨지고 단단한 돌에 새긴 돋을새김의 수법이 뛰어나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힌두교의 정체성이 녹아있는 소박한 규모의 불교 사원 난파야는 늘 마음속에 크고 위대한 것에 대한 동경심만 키우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원이다. 다만 그런 느낌을 느끼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의 마음이 겸손한 가운데 담백하여야 할 것이다.
◇ 역광에 반사되는 바간의 탑들 ⓒ 들찔레 |
돌아 나오는 길, 앳된 여자아이들이 다가와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며 우르르 물려온다. 보잘것없는 기념품들을 들고 다니며 사라고 권유하다가 관심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준다. 이른바 한류열풍이 이곳까지 번져 우리나라 연예인들의 사진이 줄줄이 나온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 연예인을 아느냐고? 본적이 있냐고? 아무리 군사정권의 압박 속에 있어도 이런 문화적인 흐름까지는 막지 못하는지 몇 개 밖에 없는 TV채널 중에 두 개가 한국 TV이며 계속해서 우리 드라마를 보여주고 한글교실까지 인기라고 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간단한 한국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으나 너무나 정확한 억양에 이후로도 자주 놀라게 되었다.
◇ 마누하 사원, 마누하와 그의 왕비 형상 ⓒ 들찔레 |
난파야와 마누하사원 사이 길로 돌아 나오는데 작은 명상소가 꾸며져 있다. 이 공간에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는 마누하왕과 왕비인 그의 아내 형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표정이 밝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왕비는 마누하왕을 외면하고 있다. 이유는 마누하가 결국 아노라타 왕에게 협력을 한 것에 대해 왕비가 질책을 하는 장면이다. 실제 마누하왕의 왕비는 죽을 때까지 노비로 살면서 끝까지 바간에 대해 대항하였다고 한다. 뜬금없이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는 아웅산수치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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