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전 부터 베트남의 수도였던 하노이
( 하노이는 강의 안쪽이라는 뜻)
8시경 눈을 떠서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희뿌옇다.
비는 조금씩 내리고있고,
차도에는 오토바이 행렬들이 줄을 이어서 각자의 일터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베트남 인들의 삶의 모습이 엿보인다.
여행기간 동고동락한 나의 룸메이트 하은이와 아침 식사를 .... 밝고 건강하게 잘 컸다.
식사 후 숙소에서 차한잔 마시면서 창밖의 기상상태를 확인
날씨가 좋으면 좋은데로, 흐리면 흐린 날씨로 대로 묘한 감정과 기분이 느껴진다.
시내투어 전 호텔 로비에서 ... 호강이다.
별이 5개 ㅎㅎㅎ
하노이 시내 일정
전용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바딘 광장의 중앙에 위치한 호치민 묘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로 신화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주변 경비가 무척 삼엄하다. ( 울 국립묘지가 떠 오른다)
1945년 호치민이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으로 (울3.1절)
( 베트남은 1858년부터 100년간 프랑스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베트남의 건국기념일(9월2일) 이면 베트남 시민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우리가 갔던 날도 예외는 아니였지만 ... 줄이 엄청길게 서있었다.
호치민 묘 양 옆에는 "사회주의여 영원하라", "호치민 주석은 우리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다"라고 쓰여있다.
베트남의 영웅 - 호치민 묘
호치민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해서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 뿌려달라고 유언을 했다고한다.
마지막까지 청빈하려고 했던 그 였지만
베트남의 영웅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국민들은 그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묘를 만들었다고.
오전에만 출입이 개방이 되는데 절차가 까따롭다.
입구에 있는 검문소에서 군인들이 가방검사를 한다.
반바지나 민소매 차림의 복장 차림으로 입장시 제한을 받을 수 있으며, 가방과 카메라 휴대폰 등은 반입 금지 품목이다.
호치민 묘를 들어가려면 개방 시간을 잘 맞춰 가야 들어 갈 수 있는데
당일 운이 좋아서인지 군인의 에스코트를 받아서 헌화도 하고 묘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묘 내부에도 여러 명의 군인들이 냉동 시신 주변을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현재 냉동 시신은
김정일, 김일성, 레닌, 스탈린, 등소평 그리고 호치민까지 총 5명으로
냉동 기술은 러시아가 최고라고 한다.
참고로
묘 내부에서 시신을 향해 손가락 짓을 하거나 하면은 반성문을 쓸 각오를 해야한다고 한다.
또한 뒷짐을 져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도 안된다고.
호치민이 사용했던 차량들
국빈으로 부터 받았던 차량들인데 평상시에는 이 차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몸이 불편했을 때에 잠시 동안 오른쪽 자동차를 사용했다고함.
사진 오른쪽 벽에 마르크스와 스탈린의 사진이 보인다
호치민 생가에 있는 주석궁!
프랑스의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다가 호치민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 후 3개월 가량 머물었다고.
우리나라는 임시정부의 잔해들을 없애버리거나 옮겨버리는데
베트남은 현재 이 건물을 국빈을 영접하거나 중요 손님이 왔을 때 회담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부귀를 뜻하는 노랑색바탕의 프랑스 풍의 건축물이다.
호치민 생가
소박한 삶을 지향하였던 호치민은
1958년 5월 17일 부터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이 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석궁에서 200~300m 정도 떨어진 곳에 베트남 소수 민족이 사는 전통가옥을 지어 직무를 봤다고 한다.
이곳에서 직무를 본 호치민은 또 다른 주상가옥으로 집무실을 옮기게 된다.
전통가옥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상가옥은 땅으로부터 1.2m 정도 떨어져 지은 집이다.
뱀, 쥐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소수민족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살렸다.
이 곳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였던 물품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전쟁이 났을때를 대피할 수 있게 지하 땅굴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호치민은 일당독재를 막기 위해 일찍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모택동 등 일당독재의 최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은 공산당 서기장이다.
그 뒤를 이은 주석은 대통령과 같은 외국과의 조약, 대외활동을 담당한다.
세 번째가 국무총리 격인 수상이다.
그 다음은 국회의장격인 국회 주석이고,
다섯 번째가 베트공(북부 베트남) 하부 게릴라조직이었던 조국통일전선 의장,
다음이 국방위원장이다.
6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움직인다.
호치민은 1.2m 높이의 주상가옥 밑 공간을 간부 회의실로 활용했다.
지붕은 전통가옥답게 야자나무 잎으로 덮여 있다.
호치민 생가 앞쪽에 위치한 호수
사진 뒷쪽의 노란색 건물이 돋보인다.
일주사
베트남 보물 1호 한기둥 사원
말그대로 기둥이 하나라서 한기둥 사원
대를 잇지 못해 고민하던 리왕이
어느날 연꽃 위에 앉은 부처님이 남자 아이를 선사하는 꿈을 꾸고
평민 처녀와 결혼하여 학수고대하던 아들을 낳았다고한다.
이에 감동한 리왕이 부처님께 감사하는 뜻으로 이 사원을 지어 그 뜻을 기리고자 했다고 한다.
* 리왕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함 (지리상으로는 동남아시아지만 )
=>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당이 멸망한 후 독립왕조를 세움
그후 여러 왕조가 들어서고 11세기에 리 왕조가 들어섬 => 국호를 다이비엣(대월)로 정함.
연못은 시름의 바다이고 사원은 활짝 핀 연꽃이라 한다.
지금도 아들을 낳기위해 혹은 입시를 앞둔 부모들이 많이 온다고!
그렇지만 이 기둥은 원래부터 시멘트 기둥은 아니였고 나무였다고 한다.
프랑스군이 1954년 하노이를 떠나면서 정자를 파괴하여 새로 복구해 놓았다고.
대략 천년의 세월을 자랑하고 있는 이 사원은 하노이의 명소이다.
공자의 사당인 문묘
호완 끼엠 호수에서 약 2km지점에 위치한 문묘는 베트남의 전통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곳이다.
이곳 문묘를 가기 바로 직전, 하마(下馬)비가 세워져 있다.
바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였다.
이곳은 1070년 레 탄 똥 황제가 문인들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자에게 바친 사원이다.
관료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베트남 국자감도 1076년 이곳에 설립됐다.
재직 때 레 탄 똥 황제가 3년시(3년마다 치루는 과거 회시라는 뜻)에
급제한 1302명의 진사의 이름, 출생지와 업적을 돌거북위 비석에 기록해 놓았는데
이를 '진사재명비'라고 부른다.
십장생인 거북이 등에 비석을 세워 이름을 새겨둔 것은 '오래토록 빛나라'는 의미이다.
(리 왕조때 송나라의 영향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 - 중국 과거제는 수나라 문제때 실시
위진남북조시대는 문벌귀족 사회(9품중정제로 신분이 세습) 로 왕권약했기때문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 )
당시 '오지임'이라는 사람은 과거시험에 8등으로 급제해 이름을 새겼는데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관료로 있으면서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문묘마당은 임금을 앞에 두고 공자사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3년시에 합격하면 1등부터 6등까지의 우수한 인재는 어사가 됐다.
우리 조선과 똑같이 이들은 임금을 대신해 지방 관리를 감찰하는 암행어사로 활동을 했다
문묘는 5개의 정원으로 구성됐다.
중앙 통로와 문은 황제전용이다. 한쪽 통로는 문관전용이고 또 다른 통로는 무관전용 통로다.
베트남 최초의 대학인 문묘
우리나라로 따지면 성균관대학교같은 그런 존재.
거북이는 베트남에서 길한 동물에 속한다고 한다.
거북이 비석에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을 새겨놓았다.
물론, 그 사람이 역적이 되거나 하면은 지우기도 하지만...
거북이 머리를 만지면 두뇌가 영석해진다고 해서
거북이의 머리가 빤질하다.
비석 아래의 거북이 목이 바닥에서 많이 떨어질 수록 시험의 난이도가 높았다고 한다.
또한 비석 규모가 클수록 유명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진사재명비'에 별도로 이들의 행적도 적고 있다.
과거에 합격해 관료 활동을 잘한 강희재라는 사람을 두고 만세사표(萬世師表)로 불렀다.
'만세에 사표로 삼으라'는 뜻이다.
봉황은 중국을 뜻하고, 거북이는 베트남을 뜻한다고 한다.
베트남은 천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것을 보면은 거북이 위에 봉황이 올라서있는데
비록 현재는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머지않아 베트남이 중국보다 더 우월해 질 것이라는
어찌보면은 약간 소심함 복수가 보인다.
베트남들이 좋아한다는 이 동상은 복제를 해서 전국으로 뿌렸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베트남은 중국의 근본이다 뭐 이런?
어찌보면 참 소박하면서도 소심한 복수극 같아 보인다.
문묘 공자 사당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두 사람씩, 총 4사람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을 빼고 3사람은 공자의 제자들이다.
수제자 중 맏형으로 종가집 종손격인 '증자'가 있고, 그 옆에는 증자와 선의의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안자'가 있다.
반대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맹자'로 공자보다 200년 후의 사람이다.
그가 제자의 반열에 함께 끼어 있는 것은 공자사상을 발전 시키는 데 가장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에 버금가는 대우해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맹자 옆에 있는 '자사'는 공자가 무척 사랑했던 제자로 공자의 친손자다.
천부적으로 천재적 머리에 명석하고 사리에 밝았던 자사는 32살에 단명했다.
이들 4사람을 흔히 '사성'이라고 부르고 공자와 함께 이곳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결혼 사진 촬영중인 베트남 신랑 신부와 함께
문묘를 나와 전용버스를 타고 시클로 타는 곳으로 이동 (팁 2달러)
1980년대 오토바이 , 자동차 대신의 서민이 발이 되었던 시클로
속도 경쟁에서 밀려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하루 만원 벌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하노이를 탄생시킨 왕 , 리따이똥 광장
오페라 하우스
빨간색 바탕에 노란 별
노천 카페
프라스틱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모습에서
여유롭고 자유로운 일상 생활의 모습이 느껴진다.
36거리
도자기, 쌀, 비단 등 36개의 뭎품을 파는 거리로
11~19C까지 왕궁의 물건을 납품하던 곳이다.
상점에는 가짜돈 뭉치를 파는 곳도 잇는데
이 돈을 제사대 사용하는 것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돈 쓸 수 있도록 돈을 태우는 용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36거리에 위치한 리틀하노이 음식점
입구를 들어서 2층 계단으로 건물이 워낙 낡고 지저분하다.
내부 공간도 생각보다 작다.
낡은 식탁 몇개와 기둥, 벽화
그리고 드높은 천정들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베트남 전통 공연장인 탕롱(?)수상극장 앞
작은 연못처럼 물이 가득한 수중무대에서 5명의 악사가 전통악기 를 연주하면서 지능억의 막이 올린다.
지능억은 보통 1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지는데 베트남의 신화에 관한 것이다.
베트남의 신화에는 주로 용이 등장하는데 자신들이 용의 후손이라 믿는다.
지능억의 진면목은 농경생활시작하면서 부터이다.
10세기 홍강에서 수확을 끝내고 연못이나 논뚝에서 공연을 선 보였다고 한다.
농어촌의 일상생활과 풍경과 축제들의 내용을 담고있어 베트남 농경문화의 진수로 불린다.
정교하고 화려한 인형의 동작은 수상 무대 뒤에서 배우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호엠끼엔 호수
호암끼엔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한 카페(2층)에서
망고쥬스를 마시면서 망중한을 즐김.
미옥샘 도장2개 새기고 (7달러)
시장 투어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
이른 저녁 식사
나짱으로 떠나기전 하노이 공항에서
베트남의 맛집
짜까거리
하노이의 젖줄인 홍강(운남성에서 발원)에서 잡은 생선 이름에서 비롯
짜까는 <가물치>를 말한다.
가물치에 커리를 익혀 튀긴 다음
소스와 야채를 넣어 볶아낸 음식이다.
http://cafe.daum.net/iloveindochina/XxsX/1?q=%C2%A5%B1%EE%B0%C5%B8%AE&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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