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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답사자료집

김유정의 삶

by 시경아빠 201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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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김유정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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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삶

 

 

 

김유정은 1908년 2월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를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유정의 사랑

 

 

 

........저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미완성 장편소설 '생의 반려' 중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녹주이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우리는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를 통해 김유정과 박녹주의 그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향에서도 김유정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 12편의 작품이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김유정이 살았던 농촌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부터 1910년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 [산미증식계획]의 명목으로 침략전쟁의 뒷바라지와 차질 없는 식량공급을 강요해왔다.

1920년 경제공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본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등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한국을 더욱 강압적으로 약탈하고 상품시장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농촌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지주와 마름, 그리고 소작농민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번이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치고 그리고 생김 생기길 호박개 같애야 쓰는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됐다. 작인이 닭마리라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낙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이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든 놈이 그 땅을 슬쩍 돌아안느다. 이 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여들고 동리사람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 하는게 아닌가 ---봄봄 중에서, 김유정 전집. 1987

 

소설 '봄‥봄'에는 읍내 사는 배참봉댁 마름인 봉필영감이 등장한다. 그리고 '봄·봄'과 '동백꽃' 이 외에 작품에서도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가 드러난다. 지주는 토지 소유자로 농지가 없는 소작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마름을 시켜 소작 농민을 감독하고, 소작료를 징수했다. 그런 과정에서 마름은 소작농민을 노예처럼 함부로 다루었고, 지주와는 별개로 수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지주는 수리조합비·비료대 등의 각종 부담까지 소작농민에게 전가하여 80%의 소작료를 수탈하였다. 소작료 이외에 노력봉사·경조사 비용 등 각종 명목을 소작농민에게 부담시켰다. 소작농민은 지주에게 신분적,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관념적 피상적 농촌소설과 달리 김유정은 실감나는 농촌소설을 썼다. 그것은 체험과 관계가 깊다. 그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했다. 또 소박하면서도 황소고집이었다. 그것은 산골에서 직접 살며 농촌 분위기를 가까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 시대의 가난한 농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농촌문학

 

 

 

 

1930년대가 평론가 안함광과 백철에 의해 재기된 한국 농민문학이 농촌 혹은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 한설야의 "탑", 김남천의 "생일전날", 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흙의 노예"와 "제1과 제1장", 김동리의 "산화", 현덕의 "남생이", 박영준의 "모범경작생"과 "목화씨 뿌릴 때" 그리고 김유정의 "동백꽃"과 고향을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 심훈, 이무영 등의 작품이 일제의식민지 농촌의 수탈현상이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그 속성으로 안고 있는 취약성, 또는 한국농업이 처해있는 역사적 생산 조건 따위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으므로, 많은 문학적 결함과 이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소재를 찾는 일종의 소재주의 위험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김유정의 문학은 이런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일정한 문학적 성과를 일구어 냈다. 당대의 농촌을 모르고서 한국의 사회현실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또 그 현실에서 태어난 문학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김유정의 문학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농민의 고단단 삶이 작품 속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해학은 작품 속의 만무방과 따라지들 같은 주인공들 보다 독자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순간 터진다. 독자는 자신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내려다보며 마음껏 웃는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 왠지 모를 비애와 동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유정의 작품은 우리 전통 마당극이나 탈춤, 판소리 등에서 만나는 어조와 해학적인 웃음처럼 우스운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대상의 결함과 비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풍자극이 대상과 대립하여 비꼬는 방법을 쓰는 반면에, 김유정의 해학은 이런 맥을 같이 하면서도 대상을 한층 넓고 깊게 통찰하면서 동정적으로 감싸 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김유정의 재능은 감칠맛 나는 속어, 비어와 눙치는 어법으로 당시 농촌의 만무방과 도시 따라지들의 슬픈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판소리처럼 들려주는 데 있다.

 

 

 

 

 

 

 

 

 

 

 

 

 

 

 

 

 

 

 

 

 

 

 

 

 

 

 

유난히 김유정의 작품에는 아리랑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리랑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무방'의 응칠이 입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 즉 소작마저도 어려워 빚만 늘어나 야반도주를 하고, 수수 일곱 되에 같은 농민끼리 살인도 마다 않는 모습과 소설 '안해'에서는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내려는 따라지와 만무방들의 모습을 애절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아리랑은 삶에 대한 한이며 애착이다. 박녹주에 대한 사랑, 궁핍한 생활, 죽어가는 몸.... 그의 작품 대부분이 당시 농민과 도시 서민의 모습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으나,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 ‘아리랑’을 통해 슬픔을 감내하고 삶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는 날까지도 고향의 봄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만무방, 따라지와 들병이가 불렀던 ‘아리랑’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투영시켰던 김유정의 아리랑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의<동백꽃>중에서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쪽 해안에 피는 상록교목의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고 불러왔다.

「정선아리랑」의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의 올동박이 바로 생강나무 노란 꽃이나 까만 열매를 의미한다.

대중가요「소양강처녀」의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에 나오는 동백꽃도 생강나무 꽃이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붉은 동백꽃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이 ‘노란 동백꽃’이라 표현하고 있다. 당시 강원도의 동백꽃이 생강나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인데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라고 꽃 냄새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박록주에 대한 구애가 거절당한 데다 연희전문에서 제적까지 당하자 유정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불현듯 고향 춘천의 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가 고향에 내려간 것은 남은 재산을 마지막으로 탕진하고 있는 형을 상대로 한 재산분배를 주장하는 소송을 내기 위한 일도 겸해 있었다. 형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둘째 누이와 함께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매형 정씨의 꾐으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유정이 고향산천을 찾아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항상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의 산골 정취가 다분히 감상적인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또한 김유정은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대 농촌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네들의 삶을 통해 그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울분이나 박록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시골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가셔졌던 것이다. 박록주에게 열중했던 것처럼 그는 고향에서 자기 자신을 다 던져도 좋을 그런 신명나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금병산을 오르내리며 봄이면 잎이 나기 전 노랗게 피어나는 동백꽃(생강나무꽃) 향기에 취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네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 속에 깃든 원초적인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네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들은 역시 자기보다 연상인 들병장수 여자들이었다. 박록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짚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들병이들을 찾아다니면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유정은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김유정은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을 안고 다음 해(1931년) 봄,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普成專門)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도 곧바로 퇴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실의에 빠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으나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게 되어 결국 건강만 더 망친 상태로 서너 달 만에 다시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광업소에 있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김유정은 먼저와는 딴판으로 사람이 달라져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 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 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 당시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농우회가

 

그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2년제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때의 금병의숙 앞에는 유정의 뜻을 기리는 「김유정기적비」(김동리 휘호)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 머물었던 기간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불과 1년 7개월 정도밖에 안 되지만 박록주를 향했던 그 병적 열정이 탈바꿈되어 새로운 길을 찾음으로써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김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 인근부락 청년들이 볼 때 서울에서 내려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비교적 건장한 덩치와는 달리 병으로 쇠약해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을 것이다. 증리에 살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에 의하면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

 

어떻든 김유정은 실레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촌 청년들을 깨우치는 일에 어느 정도 신명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 그 일이 자기에게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그가 들병이를 찾는 것도 그렇게 가슴이 허망하게 비어드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그는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가 길가 오막살이 돌쇠네 집에 들러 돌쇠 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이 그의 처녀작이 된 『산골 나그네』인 것이다. 그리고 실레 마을에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먹으며 욕을 잘하는 박봉필이란 사람을 관심깊이 살펴보곤 했다. 나중에 그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쓴 작품이 바로 『봄?봄』이다.

 

『총각과 맹꽁이』『소낙비』『노다지』『산골』『동백꽃』『만무방』『금따는콩밭』『안해』『가을』『두포전』 등이 모두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디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 세상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산골에는 잔디도 좋다.

산비알에 포근히 깔린 잔디는 제물로 침대가 된다. 그 위에 바둑이와 같이 벌릉 자빠져서 묵상하는 재미도 좋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우뚝우뚝 섰는 모조리 푸른 산이매,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 산속에 누워 생각하자면,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느끼게 된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새들도 갖가지다. 어떤 놈은 밤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 다리를 반짝 들고는 기름한 꽁지를 회회 두르며, “삐이죽! 삐이죽!”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얀 새가 “뻥!”하고, 날아와 앉아서는 고개를 까댁까댁 하다가 도로 “뺑!”하고 달아난다. 혹은 나무줄기를 쪼며 돌아다니는 딱따구리도 있고. 그러나 떼를 지어 푸른 가지에서 유희를 하며 지저귀는 꾀꼬리도 몹시 귀엽다.

산골에는 초목의 내음새까지도 특수하다. 더욱이 새로 튼 잎이 한창 퍼드러질 임시에는, 바람에 풍기는 그 향취는 일필로 형용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개운한, 그리고 졸음을 청하는 듯한 그런 나른한 향기다. 일종의 선정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짙은 향기다.

 

뻐꾸기도 이 내음새에는 민감한 모양이다. 이때부터 하나 둘 울기 시작한다.

한 해만에 뻐꾸기의 울음을 처음 들을 적만치 반가운 일은 없다. 우울한, 그리고 구슬픈 그 울음을 울어대이면 가뜩이나 한적한 마음이 더욱 늘어지게 보인다.

...................

논밭일에 소를 부릴적이면, 으례히 그 노래를 부른다.

소들도 세련이 되어 주인이 부르는 그 노래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노래대로 좌우로 방향을 변하기도 하고,또는 보조의 속도를 늘이도 줄이고 이렇게 순종한다.

먼 발치에서 소를 몰며 처량히 부르는 그 노래도 좋다.

이것이 모두 산골이 홀로 가질 수 있는 성스러운 음악이다.

산골의 음악으로 치면, 물소리도 빼지는 못하리라.

쫄쫄 내솟는 샘물소리도 좋고, 또는 촐랑촐랑 흘러내리는 시내도 좋다. 그러나, 세차게 콸콸 쏠려내리는 큰 내를 대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이하 생략)

 

-원본 김유정 전집 1987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옴폭한 떡시루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실레(증리)는 작가 김유정의 고향이며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로서 지금도 점순이 등 소설 12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금병산 자락의 실레이야기길은 멀리서 문학기행을 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등 재미난 이야기 열여섯 마당과 만날 수 있는실레이야기길은 1시간에서 1시간 반까지의 코스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금병산을 <진병산>이라고도 한다는데 왜 그런 이름이?

2. 금병산 서남쪽 자락에 신라고분군이 있다는데 정말일까?

3. 소설가 김유정, 여자야 남자야?

4.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 내려와 야학 등 농촌계몽운동을 하며 작품 구상을 했다는데 그게 언제였어? 그 야학당 이름은?

5. 김유정 소설에 들병이가 많이 등장한다는데 <들병이> 가 뭐야?

6. 김유정 소설 「동백꽃」의 동백꽃은 동백꽃이 아니다?

7.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라면서? 그게 어떤 것들이야?

8. 실레이야기길은 이야기 열여섯 마당이 있다는데 그 첫 번째는 뭘까?

 

 

 

1.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

들병이(들병장수): 병에다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 김유정 소설에는 19살 들병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남편과 함께 인제나 홍천에서 이 산길을 통해 마을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그려졌다.

 

- 관련작품 :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아내, 소낙비

 

2.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금병산 자락 장수골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겨드랑에 날개가 달린 아이를 낳자 이런 장수 아이가 태어나면 좋지 않다고 마을 사람들이 아이의 날개를 잘라버리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난 용마도 아이가 죽자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 <- 관련작품 : 두포전 >

 

 

3.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봄에 산수유가 필 때 나무에 잎이 나기도 전에 노랗게 피는 생강나무꽃이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 이다. 알싸하고 향깃한 냄새가 난다고 소설에 묘사돼 있다. 노랫말 <소양강 처녀>와 강원도 아리랑에 자주 나오는 <동박> 이 바로 김유정의 동백꽃이다.

- 관련작품 : 동백꽃, 산골

 

 

4.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19살 산골 나그네가 병든 남편을 물레방앗간에 숨겨놓고 노총각 덕돌이와 위장결혼했다가 도망간 이야기가 담겨 있는 길. <- 관련작품 : 산골나그네>

 

 

5.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소설 「동백꽃」과 「유정의 사랑」의 작품 배경이며 문화 휴식처인 잣나무 숲이 있는 산지기 시인 김희목이 가꾸는 과일밭.

 

- 관련작품 : 동백꽃(김유정), 유정의 사랑(전상국), 산국농장 이야기(김희목)

 

 

 

6.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복만이 소장수 황거풍한테 매매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은 뒤 덕냉이로 도망치던 고갯길이다. - 관련작품 : 가을

 

 

7.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춘호처가 도라지 더덕을 찾아 맨발에 짚신짝을 끌며 강파른 산등 칡덩굴에 매달리기도 하며 남편이 원하는 돈 이원 구할 궁리를 하던 그 산길. < 관련작품 : 소낙비>

 

8.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인제에서 빚잔치 벌이고 도망 온 응칠이가 닭 잡아 생으로 뜯어먹으며 송이 따던 길.

- 관련작품 : 만무방

 

9.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일제 강점기에 농촌 사람들이 얼마나 가혹한 삶을 살았는가를 수아리골 저 다락논이 증언하고 있다.

- 관련작품 : 만무방 ※만무방-체면도 염치도 없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

 

 

 

10.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금병산 산신을 모신 전각으로 가는 길. 지금도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산신각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지낸다. 금병산을 왜 진병산이라고도 부르는지, 그리고 이 전각에 가면 왜 산신제 때 술 대신 감주를 쓰는지도 알 수 있다. 산신각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신라 때의 고분군 흔적을 볼 수 있다.

 

 

 

11.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너 데련님하구 그랬대지?’

먼 하늘만 쳐다보며 도련님 생각만하고 있는 이쁜이한테 석숭이가 투정 섞어 사랑고백을 하던 곳이다.

 

- 관련작품 : 산골 ※ 이 작품에도 <노란 동백꽃>이야기가 나온다

 

 

 

12.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

 

‘저는 강원두춘천군신남면증리아랫말에 사는 김덕만입니다. 저는 설흔넷인데두 총각입니다.’

덕만이가 들병이한테 자기 소개하는 장면이다.

 

- 관련작품 : 총각과 맹꽁이

 

 

 

13.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

 

계숙이란 들병이의 꾐에 빠져 자기 집의 솥을 훔쳐 나오던 근신이네 집이 있던 곳이다.

 

- 관련작 품: 솥

 

 

 

14.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김유정이 금병의숙을 지어 야학 등 농촌계몽 운동을 벌일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5.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점순이, 봉필영감, 학곡리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살다 장가가기 위해 데릴사위로 들어온 최씨 등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그 현장이다.

 

- 관련작품 : 봄 · 봄

 

 

 

16.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김유정이 자주 찾아 코다리찌개로 막걸리를 먹던 주막집이 있던 곳이다.

 

- 관련작품: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김유정의 삶.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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