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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수도권

(강화) 삶을 들여다 보는 강화 기행 (2014060405)

by 시경아빠 201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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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생태 문학기행(2014년6월).hwp

 

 

 

 

 

생태. 독서 교사 동아리문학기행

(2014.6.4~5일)

 

 

일정

내 용

경비내역

* 1일차

10:00~11:30

학교 출발 -> 강화 연미정도착 (강화나드길 1코스)

강화 역사기행 (이시우작가와 미팅)

스타렉스 12인승 1대+

승용차 1대

11:30~`13:00

연미정 (뼈 아픈 역사의 흔적 살펴보기),

충렬사

연미정-충렬사(20분)

13:00-14:00

점심식사 - 1. 콩누리 시골밥상

 

2. 연미정할머니네 백반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39-1 032-933-9377

백반 (5,000원)

14:00-15:0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연미정 - 고인돌(25분)

15;00~`16:00

강화 역사박물관

입장료 1,500원

16:00-17:00

평화전망대

고인돌-평화전망대(20분),광성보-용궁횟집(40분),평화전망대- 광성보 (60분),평화전망대- 용궁횟집(70분)

입장료 : 2,500원

17:00-18:00

(광성보)

 

 

17:00-18:00

장화리 일몰조망지로 이동

(후포항에서 10분)

강화도 드라이브여행의 백미:분오리돈대- 동막해수욕장- 여차리- 장화리 남단의 해안도로

18:00~`20:00

장곶횟집-032)937-8266

용궁횟집(032)937-9797

낙조횟집 032-937-8813 (직접 체험후)

10만*4상 + 2만(벤뎅이)*4=48만원

20:00-

 

우리꽃자리 펜션(양도 삼흥리)으로 이동

032)937-3912

35만원 (복층)

* 양도면 사무소의 언덕위의 하얀집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 -

스즈카 지역공동체 좌담회 (유상용샘)

 

* 2일차 -

08:30~09:30

조식 - 백반

- 배달(된장, 북어)

09:30~11:30

- 강화 산마을고등학교 방문

- 학교장과의 대화

- 대안학교 교육과정협의

11:30~13:00

전등사로 이동 및 식사

삼랑성 꽁보리밥집

032)937-0397

꽃게장 반선 13,000원

032)937-5336

동문 산채비빔밥 032)937-5332

13:00~`15:00

전등사 생태 .역사 탐방

입장료 3,000원

15:00~````

학교로

 

초지대교 근처의 대선정(032-937-1907) 무청을 말린 시래기를 넣고 지은 시래기밥, 메밀을 재료로 한 칼국수인 메밀칼싹둑이를 맛볼 수 있다. 1인분 6000원.

 

 

 

 

2. 강화 생태. 역사기행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 섬 전체가 거대한 문화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문화유적 밀집도는 경주가 부럽지 않습니다. 섬 전체가 가히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안덕수 강화군수)

그도 그럴 것이 지정문화재만 해도 105건(국가지정 29점, 시지정 76점)이며, 비지정(434건)을 합하면 539건에 이른다.

 

밀집도 뿐 아니라 강화의 역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마치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같다. 우선 국조(國祖) 단군의 전설이 서린 곳이 바로 강화섬이지 않은가.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고려사>, <신동국여지승람>등을 참고해보자. 이들 기록에 따르면 단군 왕검이 나라를 세운 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고 세 아들로 하여금 삼랑성(지금의 정족산성)을 축조했으며,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마니산(해발 469.4m)이 자리잡고 있는 화도면은 원래 강화도 본도에서 떨어진 섬(고가도·古加島)이었다. 강화섬 사람들은 1880년대 이래 엄청난 간척사업을 벌였고, 고가도 역시 강화본도가 되었다. 마니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추앙받았다.

 

혹자는 몽고항쟁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왕조가 백성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지어낸 전설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관념 속에 이미 단군과 강화도가 믿음의 대상으로 뿌리 깊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대의 광개토대왕(고구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냈고, 을지문덕 장군도 해마다 3월16일 마니산에서 기도했으며, 조선조 태종도 제천행사를 이곳에서 지냈다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마니산은 영산의 이름을 얻을 만하다. 예컨대 마니산은 기가 폭포처럼 뿜어 나오는 전국 제일의 생기처(生氣處)로 알려져 있다. 기(氣)를 수련하는 이들은 새해를 맞아 마니산을 찾고 있다니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강화도가 청동기 시대, 즉 제정일치 시대의 지배자 무덤이라는 고인돌 왕국이라는 것이다. 강화섬에는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대표적인 탁자식 고인돌을 포함, 무려 150여 기의 웅장하고 잘 생긴 고인돌이 노출돼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호국의 보루가 된 강화 이후 강화섬은 그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온갖 외세침탈의 수난을 홀로 견뎌내며 ‘호국(護國)의 보루’로 그 역할을 담당한다.

 

몽골군이 침략하자 고려조정은 1232년 2월 장기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다. 수도 개경을 모델로 궁월을 짓고, 내성과 중성, 외성을 축조했다. 몽골군이 수전(水戰)에 약했던 데다 유속이 빠른 강화해협, 그리고 4억4816㎡에 이르는 광활한 갯벌은 적의 상륙을 불허했다.

 

또한 한강·임진강·예성강을 한번에 통제할 수 있었던 데다 해상으로 호남·호서 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어 장기전을 치르는데 제격이었다.

 

강화도는 1270년 개경환도를 선언할 때까지 39년간 고려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지금도 고려궁지와 석릉(희종릉), 홍릉(고종릉) 등 고려왕릉이 남아있다. 또한 호국불교의 상징인 고려대장경을 보관했던 선원사터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때는 ‘보장처(保障處·전란 때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겼고, 북벌정책을 추진한 효종과, 그의 손자 숙종은 강화도에 5진(鎭)·7보(堡)·8포대(砲臺)·54돈대(墩臺)를 설치했다. 강화도는 그야말로 요새가 되었다. 이 뿐이 아니라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봉선전, 역대 왕의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 왕실의 족보를 모시는 선원보각,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는 외규장각 등을 마련, 왕실의 위엄과 운명을 유지토록 했다.

 

독립심 강하고 넉살좋은 강화사람 하지만 200년 간의 평화는 일본과 서양의 강화도 함포사격으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1866년 병인양요, 1875년 운요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 최신식 대포로 무장한 외세의 도발에 강화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갑곶돈대와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에는 지금도 처참한 전투의 흔적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방적인 패배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했고, 이 여파로 프랑스군은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 각종 약탈물을 빼앗아 강화해협을 빠져나갔다. 나폴레옹 3세가 이 소식을 듣고 술잔을 집어던졌다니…. 또 신미양요 때는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백병전 끝에 패배했다. 하지만 미군은 훗날 이 전투를 두고 “승리했지만 자랑할 것 없는 승리”라고 한탄했다. 어재연 장군이 독전하면서 흔든 지휘 깃발인 ‘수(帥)자기’는 지난 2007년 136년 만에 귀향했다.

 

강화의 수난사를 반영하듯 강화사람들은 인내력이 강하고 독립심이 강했고, 특히 강화여인들은 시쳇말로 ‘넉살좋은 강화X’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언제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생활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피나는 노력을 섬과 섬을 잇는 간척사업을 벌여 경작지를 늘려온 것이 바로 강화사람들이다.

 

한반도 5000년 역사를 일별하려면

수난의 한반도 역사를 막아낸 방파제 역할을 하느라 피곤한 삶을 살아서 그렇지 기(氣)가 넘치는 강화엔 먹을거리도 풍성했고 특산품도 다양했다. 수확되는 은 강화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강화인삼은 말할 것도 없고 강화산 약쑥은 다른 곳보다 최고 100배나 효능이 뛰어나단다. 화문석순무는 말할 것도 없고…. 강화도 면적의 25%에 달하는 엄청난 강화갯벌은 저어새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한반도 5000년 수난의 역사가 농축된 강화섬. 사연 많고 한 많은 우리 역사를 일별하려면 다른 곳 갈 것 없이 바로 강화섬을 찾아가 보라. (출처 : 네이버 캐스트- 호국의 보루강화)

 

 

 

강화군청 -  콩누리 시골밥상

 

 

 

3. 연미정

예전엔 민통선 이북이었는데, 요즘은 통제선을 200m 북쪽으로 물린 덕분에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됐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한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모양이 꼭 제비꼬리 같다하여 이름 붙은 곳. 과연 이름처럼 아름답다.

500년은 족히 넘었을 느티나무가 정자를 지키고 있다.

 

정자는 삼포왜란 당시 공을 세운 황형(黃衡·1459~1520년)장군에게 조정이 하사한 정자란다.

 

그런데 이 절경의 정자에 뼈아픈 역사가 배어있을 줄이야.

북으로개풍, 동으로는 파주와 김포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그만큼 요충지였기에 그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숱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 붕괴됐다가 다시 서기를 여러 차례.

특히나 이곳은 정묘호란 때(1627년) 인조가 후금(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의 맹약을 맺은 치욕의 장소였다.

정자는 지금도, 뭇 은둔거사들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고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낼 으뜸의 장소로 꼽힐 법하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라.

현실은 해병대가 철통 같은 방어벽을 펼치고 있는 분단의 상징인 것을…. 갖가지 상념 속에 빠져있을 무렵, 이우형씨가 저편을 가리킨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많은 이주민(50만???)을 먹여 살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개간한 간척지에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

 

 

 

 

 

송아지 한 마리가 되살린 통일의 씨앗

 

“저기가 유도(留島)입니다.” 유도? 조강 한복판에 홀연히 떠있는 저 섬, 유도.

1996년 집중호우로 그만 떠내려가던 두발배기 송아지 한 마리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바로 그 곳이다.

비무장지대 안이라 누구도 손 쓸 수 없었던 상황.

송아지는 굶주림 속에 갈수록 여위어 갔고, 보다 못한 우리 군이 북한군과 극적인 협의를 벌인 끝에 이 섬에 들어가 송아지를 구출했다.

 송아지는 1998년 제주도 출신 암소와 혼인, 7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2006년 자연사 했단다.

이는 분단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평화의 불씨는 그대로 남아있음을 보여준 뜻깊은 사연이다.

이 연미정이 상징하듯 강화의 역사는 의미심장하다.

 

 

 

 

 

 

 

강화 중앙교회에서 이동휘선생과 조봉암선생에 대해 열강중

 

 

4. 충렬사

 

강화읍에서 찬우물고개를 넘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길로 향하면 얼마 안가 태극 문양이 그려진 대문이 세워진 한옥 한 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고즈넉한 기와돌담으로 둘러쳐진 고택(古宅)의 마당에 들어서자 정갈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분위기에 금방 옷매무새를 매만지게 됩니다.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자리잡은 충렬사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강화 역사의 생채기가 이곳 충렬사(忠烈祠)에도 한 줄 깊게 패여 있습니다.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1636~1637) 때 김상용 선생은 급히 종묘의 위패를 안고 봉림 인평대군 그리고 조정대신의 식솔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 합니다. 그러나 청군은 허술한 수비를 틈타 80여척의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와 노략질과 약탈을 자행합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상용은 적의 손에 잡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느니 죽음으로써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하여 강화 남문에 올라 그곳에 쌓아 둔 화약더미에 불을 붙이고 자폭하여 온몸으로 항거합니다. 이곳에 사당이 세워진 유래로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집니다.

 

선원이 순절한 후 그의 육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옷자락 한 조각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남문에서 10여리나 떨어진 이곳 선행리에 그의 신발 한 짝이 발견됐다. 이를 기이 여긴 후손들이 이곳에 사당을 지었습니다. 1641년(인조 19년)에 건립한 이 사당은 당초에 현충사라 부르던 것을 효종 9년(1658년) 충렬사란 사액이 내려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김상용 선생 외 병조판서 이상길 등 26위를 모신 충열사에서는 매년 10월에 이들의 넋을 기리는 제향을 올립니다.

 

김상용은 선조 23년에 문과에 급제해 정계에 진출한 후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란이 줄을 이었던 난세 속에서 한평생을 보낸 인물입니다. 척화파로 유명한 김상헌의 형으로 당시 두 형제의 충절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들의 충절은 조선 후기 내내 안동 김씨 가문이 활짝 피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세기 세도가의 핵심 인물인 김조순은 김상헌의 7대손이다.

 

 

 

 

 

 

5.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인천 강화고인돌 유적

 

 

 

기울어진 고인돌의 통일미학

 

굄돌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그 위에 큰 너럭바위가 놓여 있는데

이 큰 돌이 고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고인돌의 튀어 나온 앞머리 부분은 현세와 사후세계를 연결하는 문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풍부한 지식과 독창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이시우 선생의 고인돌 해설의 주된 내용은 ‘기울어진 고인돌의 통일미학’이었다.

굄돌의 기울어짐을 윗돌의 또 다른 기울임으로 무게중심을 유지시키는 독특한 건축미학,

즉 억지로 바로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기울어짐이 조화를 이루어 

결국 바로 서게 되는 것이 바로 ‘부근리 고인돌’의 통일 미학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유라시아 대륙에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그 중 70%가 한반도에 있다고 하니 이 또한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은 고인돌이다. 한자로 지석묘(支石墓)라고 쓰이는

강화의 고인돌은 현재 100기 이상이 현존하고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과 북방식 고인돌이 함께 섞여 있다.

 

고인돌 공원에 위치하는 부근리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수백명이 동원되어

아주 여러 날에 걸쳐 고인돌을 쌓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인천 강화고인돌 유적은

시루미산 끝자락 부분의 능선인 하점면 부근리 밭 가운데 있는 사적 제137호인

강화지석묘(江華支石墓)를 중심으로 300m 이내에 있는 고인돌군이다.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은 지석묘, 돌멘(dolmen)이라고도 하며

대체로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한다.

 

 

하점면 부근리의 고인돌군은 16기(基)의 북방식·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해 있다.

이 가운데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지 석묘는 하점면 소재지로 향하는 도로변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밭 가운데에 1기가 독립해 있는 것으로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 고인돌이다.

 

 

 

 

 

 

 

 

6. 산마을 고등학교

 

학교이념교육이념 및 철학 /교육목표 및 경영방침 설정의 배경

 

교학상장 敎學相長

교육의 3주체 가운데 중심이 학생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중심의 교육과정은 외발교육이요, 중요한 것은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에 입각한 상호중심이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자란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은 이를 표현한 술어이다.

 

교사의 변화를 견인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학생이다. 학생으로부터 끊임없이 자극받고 도전받는 도정에서 그 시험을 통과한 교사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연단을 통해 교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교사의 질적 제고 없이는 교육의 질이 향상될 수 없다. 열정만으로 변화를 이끌던 초기 대안교육의 밀월 시대는 끝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돈된 시스템과 질 높은 수업, 준비된교사의 공력, 대안적인 사회의 비젼이 요구되고 있다.

 

대안교육 代案敎育

대안교육은 살인적 입시경쟁, 승자독식의 서열교육을 거부하고, 참된 인간성의 함양이란 가치를 공통적으로 추구한다. 기존 제도학교의 문제로부터 탈피하여 교육본연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사명감으로 출범했다. 지금 한국의 대안교육은 그 과도기의 점이지대에 놓여 있고, 산마을과 같은 인가받은 대안학교들은 그 정점에서 대안교육의 중간자적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교육기본권 운동이나 비인가 대안교육의 법제화 문제도 긴 호흡으로 보면 역사적 귀결이다. 이미 특성화학교가 그 물꼬를 텄고, 곧 많은 비인가 교육기관들이 그 대열에 동참할 것이다. 이 땅에서 대안교육운동이 깃발을 든 지 벌써 20년이 흘렀다. 다음 세대를 위해 새로운 질적 변환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다. 산마을학교가 그 흐름의 선도에 서고자 한다. 산마을학교가 그야말로 앎이 구체적인 삶으로 전환되고, 교육이 실질적인 삶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오랜 꿈을 펼칠 최적지로 발돋움 하기를 희망한다.

 

끝없는 질곡에 빠진 한국교육의 탈출구는 대안교육일 수밖에 없다. 생명력이 상실된 공교육에 숨통을 틔어 놓은 특성화학교와 혁신학교 모델은 대안학교의 교육적 시도와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산마을은 이미 그 증거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를 계승하고 새로운 탐험에 나서야 할 출발선에 서 있다.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 자신이 사랑하는 삶을 살며, 변화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도모하는 치열하고 행복한 학교가 다름아닌 산마을 학교이다.

 

 

자연 평화 상생 自然 平和 相生

 

산마을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적 인간상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 ․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 ․ 지혜와 배움을 나누는 사람'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달리 간략하게 표현하면 사랑을 바탕으로 살아갈 '평화의 일꾼(Peace maker)'을 희망한다는 메시지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학교와 공동체는 '사유하는 학교 ․ 땀 흘리는 학교 ․ 마음 나누는 학교'라는 교육철학을 공유한다. 이러한 교육철학은 민주적, 개방적 의사소통, 자율과 자치의 학교 문화,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학교, 몸과 마음의 균형을 이루는 교육, 가치와 미래 지향의 진로 교육, 창의적, 개방적, 밀도 있는 수업, 지역과 세계를 생각하는 교육, 개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교육으로 구체화되어 교육과정으로 드러난다.

 

"학교공간은 무엇보다도 산마을의 '작은 구도자'들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자연에 가까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진정한 자아발견과 수행을 돕는 구도의 공간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자연에 가장 가까운 재료와 공법은 어떤 것일까?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정서를 현대적인 삶과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이런 물음들을 안고서 남도의 몇몇 서원들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또 수도자들의 생활공간인 수도원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원래 다랑이 논의 한 자락이었던 부지의 지형에 순응해서 계단식으로 여러 동들을 앉힌 것, 그리고 땅을 밟고 다닐 수 있도록 대부분의 동들을 단층으로 지은 것, 그 나지막한 동들을 전통마을처럼 몇 개의 뜰을 둘러싸고 올망졸망 모여 있는 형태로 배치한 것, 흙이나 나무나 돌처럼 자연에서 온 재료를 주로 사용한 것, 생태적인 순환 원리를 존중한 것 등은 바로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이지요."(산마을 고등학교 학교건축 이해, 이은)

 

산마을은 국내에서 그 어느 학교도 시도하지 못한 교육적 시도를 감행한 바 있다. 우선 생태적인 학교건축을 들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산마을을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자연 속에 자리잡고 자연을 닮은 건축을 지향하며 자연 소재와 자연 에너지를 사용하는 스머프마을처럼 조성된 교육공간 때문이다. 학생들이 살고 자라는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한 학습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다. 하루살이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거주공간으로서의 학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교육당사자들의 고민은 대학입시와 경쟁, 그리고 경제 효율성이란 괴물 앞에 늘 뒷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마을은 학교건축상의 행적적인 어려움도 마다않고 이를 추동해 냈다. 태아의 집이 엄마의 자궁이라면 학생의 집은 학교이다. '사람은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를 둘러싼 교육환경의 영향력은 매우 지대하다. 정겨움과 즐거움이 감도는 '집'과 같은 거주공간으로서의 학교를 건축하고 리모델링하는 작업은 교육외적인 사안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 속하는 중차대한 교육과정이자 교육설계이다. 거주지에 대해 많은 사고를 한 바슐라르는 집에 대해 '하늘과 삶의 어떠한 폭풍우 속에서도 인간을 똑바로 서 있도록 지탱시켜준다. 집은 우주에 맞서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라고 하였다. 학교에서 안온함과 신뢰를 경험하는 것은 아이들이 세상에 우뚝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과정이다. 더불어 인간이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온전하게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배우는 도구로서 교육공간이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학교라는 '집'에서 살면서, 배우면서 '말을 걸어오는 학교건축물'과 대화를 나눈다. 공간과의 말없는 대화는 물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불언지교 不言之敎'에 다름아니다. 산마을이라는 집에서 그 대화를 통해 배우는 이들은 성장할 것이고, 학교 또한 변화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째, 학교 전반에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정착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초창기의 갈등을 넘어 제2의 설립자의 뜻을 이어 다른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공익적인 학교법인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이사장을 비롯한 모든 이사진이 이사장의 측근이 아닌 인천 강화 지역의 시민 사회 종교단체 인사와 교육전문가들이 추천을 받아 구성되어 있다. 거의 모든 교육과정운영과 중요의사결정은 각 단위별로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교장조차도 공모제 형식을 통해 이사회, 교사회, 학부모회, 외부 교육학자 등이 참여하는 교장임용인사위원회가 별도로 설치되어 선임한다. 학생총회와 식구총회를 통해 중요 안건들이 공동체 정신에 입각하여 처리된다. 또한 현재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교육과정의 질적 심화를 도모하기 위해 '교육과정위원회'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 일반 학교에서는 형식에 불과한 기구이나 산마을에서는 2013년 2학기부터 교사 학부모 학생 대표가 모여 단위별로 회의와 설문작업을 통해 그간의 교육적 공과를 분석하고 각 단위의 욕구를 반영하고 대안사회의 주요 가치를 지향하며 산마을학교의 제3의 교육과정 편성 운영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교육과정위원으로 학생이 참여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적용한 선구적 사례라고 자임한다. 장차 특성화학교, 혹은 혁신학교가 담보하지 못하는 대안교육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기구로 기능하리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여타 대안학교의 교육지표도 자연 평화 상생 민주라는 이념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특정 기능인을 양성하는 학교가 아니라, 특출난 엘리트를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며 진정한 자아발견과 수행을 돕는 장으로서 학교가 존재하고, 사랑과 평화의 일꾼을 길러내기 위해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사유하고 땀흘리는 민주적인 과정이 바로 교육이 아니겠는가.

 

 

 

 

 

 

 

 

 

 

 

 

 

 

 

사유하는 학교, 마음 나누는 학교, 땀흘리는 학교

 

이미 이러한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민주적, 개방적 의사소통․자율과 자치의 학교 문화․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학교․몸과 마음의 균형을 이루는 교육․가치와 미래 지향의 진로 교육․밀도 있는 창의적 수업․지역과 세계를 생각하는 교육․개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교육이라는 교육원칙과 강조점이 설정되어 있다. 우리는 다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 따르고 애쓸 뿐이다. 사유하고 마음을 나누고 땀흘리는 배움의 공동체로서, 자연 상생 평화의 생명공동체로서의 지향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교육과정이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표어에 그치지 않고 이념을 넘어선 실천할 수 있는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보통교과와 특성화교육, 창의적 재량활동이 잘 어우러진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국제이해교육․생태환경교육․공동체 이론과 실제․삶과 철학․통합기행을 운영하는 특화된 분야는 잘 계승하여 발전시킬만한 내실을 다져왔다. 다만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인상은 받았습니다. 특히 산마을 야학은 지역의 인프라를 활용한 탁월한 프로그램이다. 지역민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어 지역의 평생교육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학생들도 적절한 자극과 개방적 관계망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산마을의 모든 교육과정 미래에의 청사진은 기본적으로 학교구성원의 동의와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교사회의 합의에 기초하지 않는 추진은 업무와 관계의 피로도를 높이고 불신을 야기시키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동반자적인 참여와 애정이 절실하다. 이사회, 교사회, 학생회, 학부모회와 유기적으로 협의하고 진행하는 과정을 충분히 밟아야 할 것이다.

 

학교구성원의 전면적 참여를 통해 비전과 규범을 공유하고, 서로 간 지지와 협력의 학교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학교내 민주적 소통을 통해 공동체적 파트너십을 유지하면 학교의 교육력은극대화될 것이다.

 

 

 

 

 

 

 

 

 

 

 

 

 

 

 

 

 

 

산마을의 미래상

산마을 학교는 강화도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 다양한 인맥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소유한 축복받은 학교이다. 게다가 지정학적으로도 탁월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작게는 수도권에 위치하여 온갖 문화적 세례와 정치적 의제를 풍요롭게 누릴 수 있으며, 넓게는 인천항과 김포 인천공항이 근거리에 위치하여 동아시아 지역과의 접근성이 매우 용이하다. 게다가 남북군사분계선을 가까이 둔 까닭에 그 어느 곳보다 국제적인 평화감수성과 통일의식의 함양에 적합한 장소이다. 이러한 외적 요소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장가능성과 미래의 역할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또한 내적으로도 그동안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닦아온 교육과정과 교사의 공력은 다음 도약을 가능하게 만드는 든든한 동력이다. 참으로 피나는 노력을 경주했지만 기존 공교육은 마을과 지역사회와 벽을 쌓아 왔고 획일화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교육방법도 극단적인 동료간 경쟁을 붙러일으키는 방식으로 고착화되어 왔다. 그래서 대안학교는 학교와 지역사회의 담을 허물어 상호 영향을 주는 교육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육방법 또한 협력하는 방식을 모색해 왔다. 그렇지만 제도적으로 학교가 안정화되면 될수록 학교와 지역사회의 연관이 줄어들고 기존의 비판받는 제도학교와 다시금 비슷해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남아있다. 산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학교와 지역사회를 항상적으로 결합시키는 틀과 힘, 그리고 내용으로서의 산마을 거버넌스와 지역에 기반한 대안대학의 설립 필요성이 제기된다. 나아가 글로벌 시대를 준비하는 중심으로서의 동아시아 교류가 더욱 중요하게 부상된다고 하겠다.

 

산마을 살림 배움터(산마을 거버넌스 및 커뮤니티 센터 구축)

우선, 지역적인 면에서 강화도에는 학식과 덕망이 남다른 인사들 뿐만아니라 내공이 출중한 재야의 고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그들로부터 얻게 될 정신적 자양과 실천적 지침, 그리고 소소한 생활의 지혜는 공동체 구성원이 학교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생활인으로서의 행복감과 세계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를 촘촘한 그물망으로 엮어 다양한 형태의 교수학습 과정을 학교와 부설기관에 개설하여 학생을 위시한 지역 공동체 사람들의 '산마을 살림 배움터(산마을 커뮤니티 센터)'로 살려나가도록 한다. 이미 산마을의 가장 특색있는 교육과정으로 자리잡고 진행되는 산마을 야학은 이의 훌륭한 기반이다.

 

'학교의 모든 강좌는 주민에게 개방하고, 주민이 현장교수가 되고 주민이 학생이 되어 평생지역교육을 하는 풀뿌리주민대학을 실현한다'는 풀무전공부의 학교 설립이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학교교육이 점점 더 이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획일화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예전보다 '인성교육', '지역학교' 등등의 용어들이 훨씬 많이 거론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학습위주의 기존교육 형태, 삶의 터전과 전혀 관계없는 단순히 변별력 확보를 위한 교육형태는 그대로 유지한 채, 몇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그치거나 교육활동의 주체 중 한 축인 학생과 학부모의 직접적인 참여없는 프로그램 운영은 여전히 만연하지 않은가? '지역사회학교'를 표방하지만 지역에 대한 충실한 파악없이, 지역에 어떠한 교육자원이 있는지, 지역에서는 학교에서 어떤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필요한지, 학교는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는 '지역사회학교'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전체가 필요하다는 격언을 기억하자.

 

동아시아 국제 청소년 교류센터

 

산마을 학교는 이미 시도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하면, 한중일을 잇는 중심축으로서 동남아시아와 인도 네팔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국제 청소년 교류센터'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 기존의 일본․필리핀․네팔 지역 학교와의 교류, 유네스코 협력학교 활동뿐만 아니라, 현재 부분적으로 하고 있는 서양권과의 인적 교류(IWC, WOOF 등) 역시 지속하는 한편,구체적인 상호교류를 위해 미국 외 유럽지역의 학교와 추가로 자매결연을 도모한다. 가급적 생명 평화 공동체 영성운동을 하는 교육기관이나 국제 NGO 단체와의 교류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고통이 남아있는 땅에서 세계의 청소년들이 모여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면 가슴이 뛴다. 장차 협약이나 혹은 위탁 운영을 통해강화 인근의 적절한 시설이나 학교를 청소년 국제교육문화센터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해 봄직 하다. 이 센터는 상생과 평화라는 학교의 교육이념을 세계인과 나누는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대안대학

 

지금은 중등과정의 고등학교 하나만 운영되지만 중장기적으로 고등교육과정을 설치하여 산마을의 이념이 사회에 실천될 수 있도록 할 실질적인 기반을 조성할 필요가 있겠다. 학교 인근의수련원과 토지를 활용하여, 대안적 가치를 추구하는 실력있는 청년을 길러낼 '대안대학'을 제안한다. 설립 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산마을을 졸업한 친구들의 진로와 연계된 유미의한 내부사업이자 동시에 대안적인 교사양성과 대안사회의 활동가를 양성하는 사회공헌사업에 이바지하는 통로가 되리라 믿는다. 덴마크의 DNS, 인도의 맨발의 대학, 홍성의 풀무 전공부는 앞선 모델이다.

 

 

 

전환학교(Transition School)

 

자연 상생 평화라는 산마을고등학교 교육철학의 사회적 실현을 위해서도 자립정신에 입각한 학교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마을과 사회의 생태적 전환은 이 시대의 교육적 의무요 과제이다.일부 나라에서 시작하고 있는 전환마을도 장기적으로는 산마을 배움터의 외연 확대를 통해 가능하리라 본다. 학교의 교육과정과 생활이 '자립과 전환'이란 코드로 재편되어, 마침내 자립과 전환이란 시대적 가치가 학교와 마을에서 전면적으로, 또 일상적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2,000여평의 학교 논을 규모 있게 경작하여 쌀만큼은 자급할 것이며, 기존의 태양광발전과 지열냉난방에 더하여 학교 내 전환기술의 보급으로 석유 및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이다. 에너지와 식량의 자립, 협동과 적정기술의 습득, 생태적 감수성의 함양, 인문적 사유와 자연과학적 사고의 조화, 나아가 영성에 대한 추구를 위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머나먼 길이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다.

 

 

탁월한 교사 개인의 교육 역량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의 욕구가 집단의 성장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랑의 그물망 위에서 서로의 개성과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여 교사와 학생이 하고 싶은 교육활동, 할 수 있는 교육활동,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교육활동 등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가슴뛰는 시간을 산마을에서 더불어 함께 보내길 우리는 희망한다.

 

비노바 바베는 말하기를 '교육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고 했다. 사자성어로 환언하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표현해도 무방하다. 물처럼 흘러가면서 학생 교사 학부모 3주체가 과거 인류의 지혜를 조금씩 온몸으로 체인하고, '교육의 목표는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다'라는 피아제의 경구를 산마을에서 온전히 실현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출처: 산마을고등학교 홈페이지>

 

 

 

 

 

 

 

 

 

 

 

 

 

 

 

 

 

 

 

 

 

 

 

 

 

 

 

 

 

 

 

대안적인 도시에서의 개방적 공동체 모델을 보다

- 일본 스즈까 공동체 -

이 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스즈까 공동체에 호감을 갖게 된 이유

 

공동체는 우리 사회의 대안 중 하나로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동체 그 자체는 어느 시대에서나 대안적 사회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그러나 정작 ‘공동체’라는 용어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강한 사회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공동체라는 용어가 지금과 같이 널리 확산된 데에는 사회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내쳐 달리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이 크게 작용했다. 예를 들면, 처음으로 공동체에 대한 논의와 실험이 활성화된 시기는 중세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새로운 이념이 서구사회를 지배하던 19세기라 할 수 있다. 당시, 사회의 최적 조건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 인간들 간의 자유계약에 의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이념은 결국 빈부의 격차, 소외된 다수 대중의 태동 등 불평등의 문제를 낳았고, 이로 인해 사회는 점차 불안하게 변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자본주의의 태동과 그에 따른 산업화의 진전으로 인해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에 이러한 이념에 대한 반작용이 태동하였는데, 그러한 반작용의 중심에 공동체라는 용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향수가 강한 편이고, 그래서 정치구호로도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다 대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의미로 사회운동에서도 점차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생명운동이 점차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해 가면서, 그러한 생명을 살리는 사회적 실천으로 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강조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안으로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이러한 생명공동체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낯선, 뭔가 공동체의 ‘내공’이 깊은 ‘자기들만의 리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일반 시민대중들의 일상과는 유리된 형태로 공동체 시도가 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동체가 이들의 일상과는 유리된 이상적 지향으로만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인들에게는 팽배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래서는 공동체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이러한 대안으로 지금껏 필자가 강조해 온 것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개방적 공동체가 새롭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소속되거나 형성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 삶에 대한 커다란 변화를 동반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결의에 찬 실존론적 결단을 필요로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대중들이 공동체를 보다 가깝고 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고, 공동체가 좋다는 ‘맛’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재 처지에서 자연스럽게 결성하고 소속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규범이나 형태가 매우 유연하게 정해질 필요가 있고, 어떠한 정도의 규범과 형태를 취할 것이냐 하는 데에 있어서, 그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율적 결정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는 공동생산-공동소비와 같이 삶의 대부분을 공동체 속에서 녹여내야 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어떤 공동체는 단지 일정한 기간 동안 모여서 자신들의 생활과 삶을 공유하는 정도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관계를 깊게 하는 데에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하지만, 공동체에 대해 개방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가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쏟는 노력과 관심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 공동체가 속해 있는 사회와의 관계 형성에도 힘써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 사회운동적 관점에서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즉, 공동체운동은 우리 사회를 공동체가 갖는 대안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목표를 보다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대안적 모습을 어떻게 사회 속으로 전파할 것인가 하는 고민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 풀뿌리운동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필자는 풀뿌리운동을 간단하게 표현하곤 하는데, 그것은 “풀뿌리운동은 단절된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공동체적으로 연결하고, 이러한 관계를 사회적으로 더욱 확대하고, 그렇게 맺어진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풀뿌리운동이나 공동체운동은 결국, ‘관계를 보다 넓게 그리고 깊게’ 만들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운동이 도시에서 실험되고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8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에 기인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농촌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모두들 농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이 그리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살기 힘들어 도시로 온 이들에게 단지 대안적 삶에 대한 비전만으로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하기에는 그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농촌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도시에서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다. 그러한 몇 가지 예로 도시에서의 노동자 협동조합과 소비자 협동조합 같은 것들, 사회적 기업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이 갖는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뭔가 2% 부족하고 아쉬운 것들이 있어 그리 만족할 만한 실험들이라 여기지 못하고 있던 차에 스즈까 공동체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스즈까 공동체는 야마기시 공동체의 ‘연찬’ 이라는 영성에 바탕을 두고 있고 도시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 내부에서 공동체 식구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과 달리 지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이 10년 정도의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구성원들 스스로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외부와의 교류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호기심을 끌만했다.

 

 

 

 

스즈까 공동체 식구들과의 만남

 

스즈까 공동체는 일본 나고야에서 육로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우리는 나고야 역에서 배를 타고 츠시(津市)로 가서 스즈까 공동체에서 마중 나온 분의 차를 타고 약 20분 정도 간 후 스즈까 공동체에서 마련한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에 도착했였다. 스즈까시는 일본의 유명한 세계적 기업 혼다(HONDA)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다. 게스트 하우스로 향하면서 도로 양쪽에 썰렁하게 불이 꺼진 혼다 노동자들의 숙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경제 침체로 혼다에서도 노동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이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란다. 이는 당연히 스즈까 지역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도착한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우리를 마중나왔던 오노 마사시씨와 그의 아내인 오누 마우끼씨,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를 담당하고 계신 이오다 요시아끼씨와 그의 아내인 세스꼬씨, 그리고 사이언스 스쿨에서 합숙생활지원 역할을 하는 하기와라 히데꼬씨와 첫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은 이 분들이 스즈끼 공동체에서 맡은 역할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이지만, 이 분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만은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사이인 만큼 간단히 서로의 소개를 했는데, 한국에서 방문한 우리를 소개할 때마다 이들이 보인 반응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 일본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분들의 반응은 그러한 사전 지식을 감안해도 다소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 사전에 우리가 보내준 방문자들의 단체에 대한 소개를 통해 우리가 하는 일 등을 간단하게는 알고 있었음에도, 방문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할 때마다, 우리 말로 “와 대단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처음에는 너무 과장된 감탄사에 약간은 무안했는데, 이후 이틀을 더 지내면서, 이들로서는 그만큼 우리를 환영한다는 마음을 그리 표현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면서 이들로부터 공통된 인상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들 모두 얼굴이 매우 밝았다는 것이다. 물론, 손님을 받는 기본적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럴 수도 있겠지만, 2박3일 머무는 동안 한결 같은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방문자들이 일본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밝은 표정은 3일 내내 이어졌고, 그 속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여러 현장을 방문하면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간담회를 위해 저녁시간을 내어 우리 숙소를 방문한 이들 모두 처음에는 다소 수줍은 표정을 보였으나, 곧 정겨운 미소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밝은 표정의 얼굴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스즈까 공동체에 오려 했던 이유를 충족시켜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과 함께 이들의 표정이 왜 밝고 행복해 보였는지 그 이유를 찾고 싶다는 욕구가 보다 강해졌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방문한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된 스즈까 공동체에 대한 탐구는 처음부터 우리 예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즈까 공동체가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공동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은 혼란에 휩싸였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질문들을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우리의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그 이유는 이들과의 대화가 진전되면서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스즈까 공동체

 

 

스즈까 공동체를 처음으로 접한 계기는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밀린 보고서를 급하게 마감하도록 하기 위해 주최 측에서 강화도의 한 펜션을 임대해 그 곳에서 밤샘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2009년 11월 경의 일이다. 그러다 우연히 우리가 묶었던 펜션의 주인(유상용씨)이 한국의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살다 그 곳을 떠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배도 비슷하고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짧게 나누다보니, 이 분이 야마기시 공동체를 나와 강화도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이유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블로그에 자세히 소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일본의 스즈까 지역을 방문하여 그 공동체 식구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유상용씨를 통해 피상적으로 알았던 내용이 완전한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유상용씨가 왜곡된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한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스즈까 공동체 이야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나온 이들을 주축으로 새롭게 도시에서 실험되고 있는 스즈까 공동체는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형태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평소 도시에서 새로운 개념의 개방적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던 필자로서도 공동체에 대해 고정된 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스즈까 공동체는 통렬히 일깨워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즈까 공동체는 그 범주를 규정할 수 없는 완전한 개방적 공동체 형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의 수도 명확치 않고 공동체의 규범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당연히 일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를 공동체라 규정하는 기준은 ‘사람의 변화’ ‘사람 관계의 변화’ ‘사회의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관계를 성찰하고, 사회를 성찰하는 과정에 큰 역점을 두고 있었다. 즉, 이들은 스스로 성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공동체 식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야말로 온전히 개방된 공동체이고, 공동체의 정신을 통해 서로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이러한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되고 어떤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보다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물론, 이틀간의 조사 정도로 스즈까 공동체에 대해 자세하고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일단 조사자들이 그 정도의 조사로 이 공동체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자들은 그 정도의 조사내용을 통해 이해된 것 자체도 매우 새롭고 우리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스즈까를 방문한 조사자 모두는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이고,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그러한 선상에서의 관심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사자들의 관심이 전통적 개념의 공동체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고, 사회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도 스즈까 공동체는, 비록 얼핏 살펴본 것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많은 이들과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즈까 공동체의 형성과 전개

 

스즈까 공동체가 아무리 공동체의 범주나 울타리가 없다하더라도 중심적 사상과 영성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이를 계속해서 형성・발전시키는 사람들이 있는 한 처음에 이 공동체를 형성한 핵심적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 과정이 존재할 것이다. 스즈까 공동체를 처음 결성하고 지금도 핵심적으로 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인근의 야마기시 농장(공동체)에 있던 이들이다. 이들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이상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생활해 왔다.

 

야마기시 공동체의 목표는 자연친화적 삶을 통해 모두를 위한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그 삶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야마기시 선생의 저작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양계를 중심으로 한 야마기시 공동체는 실현지(實現地)가 아닌 실험지(實驗地)였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연구를 위해 2000년부터 모임을 따로 시작했다. 그러나 야마기시 공동체는 그러한 모임을 야마기시 공동체 내에서 못하도록 했다. 이에 2001년부터 몇 사람들이 야마기시 공동체 인근의 스즈까시로 이주하였고, 스즈까에서 사람과 사회에 관해 진정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은 스즈까에서 어떻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고, 지금의 스즈까 공동체는 그러한 고민들이 현실화된 모습이다. 이들은 사이엔즈 연구소를 만들고 전혀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등으로 새로운 공동체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새로운 젊은 사람들이 스즈까로 모여들어 현재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벌이고 있다.

 

스즈까 공동체가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의 핵심은 사이엔즈 스쿨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이엔즈 스쿨은, 사람의 마음이나 인격적 성장 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활동을 한다고 해도 사람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이는 권위나 규칙 등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즉, 이 스쿨을 통해 사람들의 자율적 관계 형성과 이를 넘어 사회와의 자율적이고 긴밀한 관계 형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공동체 영성을 전파하고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사이엔즈 스쿨이 있음으로서 AS onE 이라는 회사들이 전혀 새로운 공동체적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었고 정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이엔즈 연구소와 사이엔즈 스쿨, 그리고 AS onE 으로 대표되는 회사들은 각각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예를 스즈까 문화 staton을 설립하는 과정을 통해 살펴보자.

 

스즈까 공동체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방식은 누군가 스즈까 공동체 핵심 멤버들의 기획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즉, 조직이 결정하면 조직원들이 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타 공동체 식구들은 지원과 응원을 해준다. 따라서 스즈까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inner circle이 존재하지 않는다.

카주끼 씨는 야마기시 공동체를 나와 스즈까에 정착한 후 사이엔즈 스쿨을 다니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순수한 뭔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동시에 얻었다. 이 때 옆에 신뢰하고 그래서 함께 그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 둘은 만나 서로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조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사업 구상은 두 사람만으로 진행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사이엔즈 연구소의 오노 씨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자 오노 씨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들의 구상에 함께 하고 응원해 주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데 있어서 이 둘을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이 재정지원을 하게 되었고, 결국 새로운 센터인 스즈까 문화 station을 만들게 되었다.

 

이들은 스즈까 공동체의 구성원이 몇 명인지를 묻는 질문에 상당한 당혹감을 나타냈다. 자신들도 그 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공동체 구성원이라 여기는데, 그러한 구성원의 수가 몇 명인지 자신들도 정확히 모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난 10년 동안 이러한 스즈까 공동체의 영성과 철학에 동의하는 이들이 상당 정도 확대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이들을 만나는 마지막 날에 공동체 식구들의 규모가 대충이라도 어느 정도 되는지 다시 한 번 질문하였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상의를 하더니, 성인들만 150명 정도가 스스로 스즈까 공동체 식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이들은 지금의 스즈까 공동체가 자신들의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들은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는 생각과 공동체 등이 계속해서 변화・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지난 10년의 실험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가 드러났고, 이를 외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공동체의 속성 자체가 지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듯이, 스즈까 공동체도 앞으로 계속해서 진화・발전해 갈 것이다.

 

 

 

스즈까 공동체를 떠받치는 세 개의 중심 기둥

 

스즈까 공동체는 크게 세 개의 요소들을 통해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지역사회 내에서 실현하고 있다. 그 세 개의 요소라 함은 사이엔즈 연구소(SCIENZ Institute)와 사이엔즈 스쿨(SCIENZ school), 그리고 AS onE 커뮤니티이다.

 

여기서 사이엔즈라 함은 Scientific Investigation of Essential Nature(과학적 본질의 탐구)의 약자이고, 여기서 Zero 즉 영, 무(無), 공(空)의 뜻을 연결한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 탐구라 함은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사물 모두를 고정되어 있어나 정체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그러한 변화의 배경에 있는 본질과 원리를 알아나가기 위한 차원에서 사이엔즈라 명명하기 시작했다.

사이엔즈는 인간의 지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함으로써, 과학적인 본질을 탐구하고 실현하기 위한 방향을 고려하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이 세 가지 구성요소들은 PIESS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이 네트워크는 사이엔즈에 기반한 사회활동을 위한 것이다.

 

 

① 사이엔즈 연구소

사이엔즈 연구소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인간에 대해 알고, 이를 통해 행복의 조건을 발견함으로써 물질적으로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는 최근의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지고 있지만 인간사회라는 차원에서는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는 문제인식에 기초한다. 따라서 인간사회의 문제에 대한 대처 및 시정 방안을 발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주요한 활동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문제의 근본 원인과 사람의 본질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이엔즈 연구소는 인간성과 사회조직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인간의 본질에 기초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길과 그 방법을 고안하는 활동을 하고자 한다. 분노와 경쟁, 차별과 빈곤 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지성과 정을 살리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실현하고 연구하며 실험하는 곳이다.

 

사이엔즈 연구소가 구체적으로 하는 일은 사이엔즈 스쿨에서 연수를 받는 사람들이나 AS onE 기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문제들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사이엔즈 스쿨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 원인이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당사자와 함께 찾는 과정을 밟는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AS onE 기업에도 적용하여, 기업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내적 관계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조사・분석과 컨설팅을 수행하기도 한다.

 

 

② 사이엔즈 스쿨

사이엔즈 스쿨은 스즈까 공동체가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자 도구이다. 이 스쿨은 사람으로서의 성장을 위한 서포터(supporter) 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자기 성찰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스쿨이 스즈까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인 것은, 스즈까 공동체의 정신이 사람의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이 스쿨이 그러한 역할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의 인격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어떤 활동을 한다고 해도 사람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질 수 없고, 그에 따라 권위와 규칙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권위와 규칙에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의 자율성과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며, 스즈까 공동체가 야마기시 공동체로부터 독립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이엔즈 스쿨은 자기를 알고 인생을 알며, 지성과 마음의 합일을 육성하고 부자유와 구속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며,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최적의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로, 스즈까 공동체 식구로 일본어 통역이 힘들 때 영어로 통역을 해주신 히로꼬 가또야마씨의 경우, 지금까지 자기의 생각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 지금까지의 교육 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남자 동료가 큰 소리로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하면 이에 소극적으로 반응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곳에 와서 자신의 순수한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자신이 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후,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사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스쿨에서는 다양한 연수를 상시적으로 운영한다. 가장 기본적인 과정은 4개 인데, 마이 라이프(My Life) 세미나, 내관(內觀) 과정,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과정,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한 과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기본 과정은 단순히 네 개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일상화 레슨과 연수생 과정 등으로 구분하는 등 다양화하고 있다. 그 외에 보다 진전된 심화 과정으로, 인생을 알기 위한 과정과 사회를 알기 위한 과정이 있다. 사이엔즈 스쿨의 일정표를 살펴보니 일 년 내내 각 과정의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코스를 통해 스즈까 공동체 식구들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고 나아가 인생과 사회를 이해하도록 지원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참여 자격은 스즈까 공동체가 특정한 구성원을 구분하지 않듯이, 원하는 사람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 코스에 한 번 참여하면 그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코스에 언제든지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과정을 모두 수료해야 공동체 식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계속 반복하듯이, 스즈까 공동체는 공동체의 울타리를 쳐놓고 공동체 식구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코스는 다만 새로운 사람과 사람관계,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스즈카 공동체 정체성과 영성을 심화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따라서 이 과정들을 모두 수료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스즈까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긴밀한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길 원치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이 사이엔즈 스쿨의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스즈까 공동체 식구로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즈까 공동체 공통의 정체성과 영성이 이 사이엔즈 스쿨을 통해 각자에게 깨달음을 전달해 줄 뿐이다.

 

그리고 사이엔즈 스쿨의 과정은 특정하게 정리된 사상이나 철학, 믿음 등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야마기시 공동체를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한 것은 그러한 고정되고 고착화된 사상이나 믿음 등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③ AS onE 커뮤니티

AS onE 은 존 레넌의 명곡 이매진(imagine)이라는 노래의 후반부에 나오는 가사이다.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이 노래 가사는 “국가라는 구분도 종교도 없는 세상, 그래서 서로 죽이지도 않고 죽을 일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아마 나를 몽상가라 말할지 몰라요. 하지만,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나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 같은 생각을 하길 바래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즈까 공동체가 바라는 세상도 바로 이 노래 가사에서 꿈꾸는 세상임을 보여준다.

 

AS onE 커뮤니티스즈까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기업들의 네트워크를 말한다. 이 기업들은 회사를 위한 회사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회사경영, 회사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회사운영, 직원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직장을 구현한다는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선언만으로는 그리 새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회사 운영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다.

 

AS onE 기업에 종사하는 직원들 모두가 공동체 멤버는 아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임원들은 모두 공동체 멤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 멤버들이 회사를 창업하고 직원들을 고용하는 단순한 방식도 아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고 싶으면 사이엔즈 연구소 등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을 소개받고 함께 창업을 준비한다. 따라서 새로운 사람들이 스즈까 공동체에 결합하면서 그 사람의 기술 등을 살려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회사로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단지 생산해내고자 하는 상품이 같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회사의 경영목표나 운영방식 등에 있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스즈까 공동체 멤버(물론, 멤버라는 규정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도 누구나 원하면 사이엔즈 스쿨에 들어가 연수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AS onE 기업에 있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고 특이한 점은 회사의 운영방식이다. 임금이나 출퇴근 규정 등 회사운영과 관련된 내용들은 직원들과의 합의를 통해 결정된다. 출퇴근 시간을 예로 들면, 그 특이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 이들 회사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직원 누구라도 자기가 출근하고 싶은 때 출근해서 퇴근하고 싶을 때 퇴근한다. 일주일에 하루만 출근해도 되고, 7일 동안 출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필요한 생산량을 달성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가능한 적은 시간 일하고 싶지 않을까?

 

이러한 우려와 이러한 이상적 협동경제공동체들이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는 것에 대해 이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최소한의 규칙만을 정해놓고, 나머지는 개인의 의지로 메워가려 하고 있었다. 이런 운영방식을 채택할 수 있었던고 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것들을 지원하기 위한 사이엔즈 스쿨과 사이엔즈 연구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이 운영하는 회사들은 대부분 경기불황 속에서도 성공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가장 성공한 회사라 할 수 있는 ‘엄마손 도시락’ 회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이 점심시간에 판매할 도시락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오전 10시 경까지 필요한 도시락을 만들어야 한다. 직원들은 이 시간까지 필요한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 자율적으로 출근해서 도시락을 만든다. 그렇게 해서 보통 하루에 1,000개 이상의 도시락을 판매하고 있다. 당연히 조금만 일하고 월급은 많이 일한 사람만큼 달라고 요구하는 직원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임원들과 해당 직원들이 충분히 상의하고 합의해서 임금을 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힘은 바로 이들의 공동체 영성에서 나온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 공동체 영성은 바로 사이엔즈 스쿨에서의 연수를 통해 형성되고 발전되며, 사이엔즈 연구소를 통해 현실에 적용된다. 이렇게 사이엔즈 연구소와 사이엔즈 스쿨, 그리고 AS onE 기업들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스즈까 공동체를, 비록 그 범주를 정할 수 없지만,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야마기시즘과의 관계

이들이 야마가시 공동체를 나왔다고 해서 야마가시 선생의 사상과 결별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현재도 야마기시 선생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기존 야마기시 공동체가 야마기시 선생의 실험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고 한다면, 스즈까 공동체는 그 사상을 오늘에 맞게 재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야마기시 선생 스스로도 원리주의를 배척했다고 한다. 그래서 연구라는 것이 중요하고, 연구를 통한 변화・발전이 오히려 야마기시 선생의 사상에도 더욱 맞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야마기시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연찬’이다. 스즈까 공동체 역시 이 ‘연찬’을 가장 중요시 한다. 다만 이들에 의하면, 야마기시 공동체의 연찬은 지금까지 해 온 것들에 바탕을 둔 반면, 자신들의 연찬은 가장 밑에까지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만드는 새로운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은 사회와의 관계도 이러한 개인의 변화를 통해 긍정적이고 변화 지향적으로 맺을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는 느리지만, 근본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필자가 풀뿌리운동의 핵심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이들은 맨 처음 스즈까에서 공동체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목표를 정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각자가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0년의 경험을 통해서 그러한 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사이엔즈 스쿨이나 사이엔즈 연구소, AS onE 등의 체계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 체계들의 구체적인 작동 시스템과 효과 등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직접 체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최근 스즈까 공동체에서는 외국에서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를 배우기 위한 사람들이 찾아와 사이엔즈 스쿨에서 일정 기간 동안 연수를 받는 일이 드물지 않게 생기고 있다.

 

이들도 연찬을 중요시하기는 하지만, 합동 연찬회와 같은 모임을 갖지 않는다. 그냥 각 단위의 활동체가 연구소 등과 협의해 연찬회와 같은 것을 한다. 따라서 그 연찬의 내용도 각 사업체에 따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그 핵심에는 사이엔즈 스쿨의 연수과정과 사이엔즈 연구소의 지원이 큰 몫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스즈까 공동체의 사회적 실현 기관들

 

스즈까 공동체의 철학과 영성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회사 및 기관들이 스즈까 내에서만 여럿 있다. 이들을 ‘스즈까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회사 및 기업’이라 표현하기에는 뭔가 스즈까 공동체의 모습을 왜곡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소제목을 ‘스즈까 공동체의 사회적 실현 기관들’이라 붙였다.

 

사이엔즈 연구소와 사이엔즈 스쿨의 경우에는 명확히 스즈까 공동체에 대한 영성과 철학, 그리고 이상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사람들이 그러한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실현기관이라 할 때는 가장 대표적으로 AS onE 커뮤니티를 들 수 있다.

 

영리 사업체로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시락 가게이다. 이 회사는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현재 스즈까 지역에 3개의 지점을 냈다. 이 도시락은 큰 가게에서 파는 도시락에 비해 싼 편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락을 만들 때 전혀 기계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만들기 때문이고, 재로도 일부 유기농을 비롯해 좋은 것들만을 쓰기 때문이다. 이들의 모토는 ‘엄마가 만든 도시락’을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에서도 질 좋은 도시락으로 소문이 났고, 주로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구입하는 편이다. 보통 하루에 1,000개에서 1,100개 정도 팔린다.

 

그리고 이 도시락 가게는 지역 내 자립적 경제구조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음식점이나 도시락 가게들은 농장에서 재배한 야채를 바로 구입하지 않고 대기업에서 자동화 기계로 씻거나 껍질 벗긴 것을 구입해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은 직접 농장에서 야채를 구입하여 직접 씻고 썰고 해서 음식을 만든다. 이런 방식은 위생적으로도 우수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그리고 도시락 가게의 성공은 AS onE 농장이 운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농장의 경우 도시락 가게라는 안정된 판매처가 있다는 점에서 시작에 유리한 점이 있었고, 지역 내 일자리 창출과 유기농 채소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립적, 자급적 경제체제는 건설회사의 운영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AS onE 커뮤니티에는 건설회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4채의 공동주택을 건립하였다. 나중에 이 집들을 방문해서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만났던 스즈까 공동체 식구들은 모두 이 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 건설회사 역시 공동체 식구들의 필요에 조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 건축회사와 연관된 부동산 사무소, 실내 인테리어와 주택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인테리어 가게(伊勢의 森工務店)도 이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 그리고 스즈까 지역의 핵심 그룹인 혼다 공장에 인력을 파견하는 아웃소싱(outsourcing) 사업도 운영하고 있다.

 

이 사업들은 모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업들은 하나의 그룹과 같이 연계되어 운영되는데, 금융기관에서는 AS onE 커뮤니티를 매우 건실한 기업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현재 AS onE 회사들의 대표인 노지리 히로 씨는, 소규모이지만 다양한 사업들을 벌임으로써 위험부담이 분산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예로 현재 경제위기 여파로 혼다가 어려워지면서 인력파견사업은 침체를 겪고 있지만, 그로 인한 어려움은 다른 회사들의 성장으로 충분히 상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사회적 활동이 단지 영리 기업의 운영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그 외에도 인근 대형 유통매장주가 지주인 비어있는 땅을 무료로 임차하여 주민들의 주말농장과 같은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고, 각종 유실수를 심는 등으로 또 하나의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농장의 운영은 수익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근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주민들의 공간, 즉 공원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목적 갖고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스즈까 문화 station이 포함되어 있는 코코로(cocor, 마음)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는 스즈까 지역의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스즈까 문화 station은 문화적인 면을 중시한 마을만들기를 주로 수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현재는 그 활동의 영역을 스즈까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조사보고서를 정리하며...

 

앞서 언급했듯이, 스즈까 공동체는 도시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방성이 강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영성과 철학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사회에 대한 성찰까지로 이어지는 이들의 영성은 고정・불변의 형태를 거부하고 유연하게 항상 진화하는 것을 중시한다. 또한 자신들의 영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부터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스즈까라는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개인과 사회에 대한 영성을 중심으로 하는 개방적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개방성은 인적 구성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AS onE 커뮤니티는 흡사 우리나라의 사회적 기업을 연상케 하고, 다양한 지역활동은 우리의 풀뿌리운동을 연상케 한다. 한 예로, AS onE 농장 옆에는 농산물 직판장을 두어 운영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그 곳에서 AS onE 농장 생산물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AS onE 농장 생산물은 단지 한 코너만 차지하고 있고, 그 지역 농민들의 생산물 판매 코너가 AS onE 농장 생산물 판매 코너와 같은 크기로 마련되어 있다. 각 코너에는 그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사진과 이름이 걸려 있어, 각 코너가 누구의 생산물을 판매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스즈까 문화 station은 풀뿌리운동을 지향하는 단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 문화 station이 커뮤니티 station, 생태적 station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들은 2010년 9월부터 지역통화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계획은 사이엔즈 연구소를 통해 구상되고 있는데, AS onE 회사들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성공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공동체 실험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도시에서의 개방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도 이러한, 그러나 이와 똑같지 않아도 좋은 다양한 공동체 실험들이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험들이 상호 교류되기를 또한 바라고 있다. 이는 이들이 지향하는 개방적 세계관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 세계관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변화・발전시키고자 하는 사회운동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조사보고서는 스즈까 공동체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외형적 모습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스즈까 공동체의 핵심적 내용과 영성, 철학은 아무래도 이 곳에서 직접 체험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 점에서 올 초에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블로그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이들과 같은 삶의 궤적 속에서 비슷한 고민과 그 고민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의 스즈까 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스즈까 공동체에서 만난 사람들의 밝은 얼굴들 중에서도 인상에 남는 분들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한다. AS onE 건설회사에서 일하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분. 그 분은 암 수술을 몇 차례 받아 건강이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AS onE에서 일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은 건강도 회복되었다며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 덕에 이 분의 아내는 cocoro 센터에서 일본식 다도(茶道)를 가르치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에게 그 다도를 직접 체험케 해 주었다.

 

공원을 조성하는 곳에서 만나 젊은이는 이 곳이 어린 학생들로 붐비는 모습을 상상하며 일을 한다며 수줍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출생해 나이가 들어 도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28세 된 고바야시 코치라는 젊은이는, 대도시에서 사람 중심이 아닌 일 중심,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순수한 생각을 교류할 사람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그 곳에서 삶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 다시 어머니가 살고 있는 스즈까로 내려와 AS onE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 젊은이가 대도시의 화려한 삶을 뒤로 하고, 아내와의 헤어짐(이혼이 아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곳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이 곳에서는 나의 순수한 생각과 이상을 공유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항상 밝은 미소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던 스즈까 공동체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이오다 요시아끼씨는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에 우리와 처음으로 한 식탁에 앉았다. 그 전에는 주로 다른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느라 이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떠나기 전에 이 분도 우리와의 만남에 반가움을 표하고 싶었던 듯하다. 우리 중 한 명이 이 분께, 야마기시 공동체를 떠날 때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는가 물었다. 그에 대한 이오다씨의 대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나는 야마기시 공동체에서도 항상 올바른 것을 탐구하고 추구해 왔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이자 성찰이었다.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나와 스즈까로 온 것도 그러한 탐구의 과정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두려움이 있을 리 없었다.”

 

 

 

 

 

전등사

본 사찰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진종사라 이르다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원비 정화궁주가 불전에 옥등을 헌납한 후 전등사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약사전, 범종을 비롯하여 실록을 소장했던 사고지 조선왕실의 족보를 소장했던 선원보각지가 남아 있으며, 특히 선원보각지는 고려 시대에 팔만대장경을 판각 봉안했던 장경각이 있던 곳이다

 

삼랑성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출처 : 전등사 홈페이지>

전등사 정족사고

사고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 및 문서를 보관한 전각을 일컫는 말이다.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으로 사찰에 보관되었던 것은 고려 때인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이때 고려 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3대서고)에 사고를 설치하여 역대 실록을 분산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및 성주의 사고가 소실된 반면 전주의 사고만 유일하게 보존되어 그곳의 실록 등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 명종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했다. 그러다 구한말인 1908년, 정족·태백·오대·적상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은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렇게 보면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수난을 많이 겪은 셈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과 교훈을 생명처럼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정성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 : 전등사 홈페이지>

 

 

 

강화 생태 문학기행(2014년6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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