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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지리

모헨조다로

by 시경아빠 201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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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Mohenjo-daro]파키스탄 유적지 | 브리태니커

 

파키스탄 남부 신드 지방의 인더스 강 동쪽 연안에 있는 한 무리의 마운드로 구성된 유적.

모헨조다로라는 이름은 '죽은 자의 흙무덤'을 뜻한다.

 

모헨조다로의 고고학적 중요성은 1922년 처음으로 인정받았고 

그뒤 발굴을 계속해 마운드 속에서 인더스 문명 의 가장 큰 도시 유허를 발견했다.

5㎞에 달하는 도시 둘레, 유구(遺構)와 유적의 내용물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도시는 과거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고대국가의 수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인더스 강에서 3㎞ 떨어져 있는 모헨조다로 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인위적 장벽으로 인더스의 범람을 막았으며,

도시는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을 보이는 12개의 구역 혹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구역의 크기는 남북 길이 384m, 동서 길이 228m로서,

그 안은 곧거나 구부러진 통로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도시 서쪽의 중앙부는 6~12m 높이로 진흙과 진흙벽돌을 쌓았고, 그

 규모는 불확실하지만 구운 벽돌로 사각형 탑을 덧쌓아 이를 더욱 보강했다.

 

정상부에 위치한 건물에서는 베란다로 둘러싸인 우아한 욕조 또는 수조(水槽)와 더불어

대형 주거용 구조물, 거대한 곡물창고,

최소한 2개의 복도가 딸린 집회소가 확인되었다.

요새로 보이는 이 건물은 유적 전체의 종교·의식과 관계된 본부가 있었던 곳임에 틀림없다.

 

도시 아래쪽에는 상당한 정도의 중산층의 거주지임을 보여주는 마당 딸린 집이 꽤 나왔다.

 대부분의 집에는 작은 목욕탕이 있으며, 거리와 마찬가지로 수도와 위생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벽돌계단이 있음을 볼 때 2층이었거나 편평한 지붕에서도 사람이 살았으리라 생각된다.

 

건물벽은 원래 진흙을 발라 표면을 다듬었는데,

이것은 변화하는 열과 습기 때문에 벽돌에 포함된 소금기가 반응하여 일으키는 파괴작용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건축물을 장식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은데

이는 지금은 사라진 목재구조물의 가공에만 장식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조물 역시 거의 보이지 않지만 좁은 이마, 사람을 깔보듯 가늘게 뜬 눈, 눈두덩을 덮고 있는 머리띠,

원래는 붉은색 점토로 채워진 삼판문(三辦紋)이 부조(浮彫)로 조각된 외투를 왼쪽에 걸친 수염 난 사람의 완전한 머리와

어깨 부조등 몇몇 단편적 증거는 찾아볼 수 있다.

 

이 도시에서 발견된 조형예술품 중 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팔찌 몇 개만을 두른 채 벌거벗고 춤추고 있는 어린 소녀의 청동상이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작지만 훌륭히 제작된 황소와 물소를 비롯한 테라코타도 수없이 많이 발견되었다.

여성의 모습에서는 정교한 머리장식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몇몇 작고 뚱뚱한 그로테스크 상은 남성상이든

여성상이든 당대인의 투박한 유머 감각을 드러내준다(→ 색인 : 인더스 문명).

 

 발견된 증거에서 모헨조다로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위가 장기간 지속된 대홍수의 재난을 여러 차례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재난은 인더스 강의 수로변경으로 강이 도시 가까이 흐르게 되었거나

모헨조다로와 바다 사이의 지역이 지각상승을 받아 인더스 유역 배후지가 호수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모헨조다로의 찬란함  

 

인더스문명의 꽃 모헨조다로, 현재에는 파키스탄 신드지방 라르카나에 있다.  

황량한 언덕위에 세워진 모헨조다로는 '죽은자의 언덕'이라 불리었으나

이제는 세계 유산에 당당히 등재되어 오히려 살아있는 언덕이 되었다.
 인더스강이 범람하면서 밀어붙인 황토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설한 모헨조다 로는 애초부터도 붉은색 도시였다. 

   진 흙과 벽돌을 섞어 만든  요새유적 정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를 얼핏 불교유적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실제1922년 이 유적을 처음 조사했던 영국 고고학자 R D 배너지도 모헨조 다로를

불교유적으로 보고 탑파 주변을 발굴했을 정도였다.

더구나 서기200년쯤 쿠산왕조시대의 동전이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탑파 주변을 더 깊이 파들어가서 생전 보지못했던 인장(印章)한 점 을 발굴해냈다.

그 인장은 바로 세기적 유물로,모헨조다로가 인더스문명 유적 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공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는 BC2500∼1700년까지 8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던 도시다.

그러니 까 요새유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가 멸망한 이후 1천9백여년이 지나고 나서

파괴된 모헨조다로 유적지 위에다 쌓아올린 불교유적인 것이다.

어떻든 모헨 조다로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거의 신석기시대를 살 무렵에 계획된 도시를 건설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도시 면적은 어림잡아 4천8백여㎡를 웃돌았을 것으 로 보고있다.

  오늘날 모헨조다로 유적은 편의상 네 블록으로 나누어 블록마다 고유부호 를 붙였다.

블록의 부호는 발굴자들 이름에서 약자를 따다 만든 것인데,

요새 유적은 SD구역으로 되어있는데 이 유적은 도시의 중핵(中核)이라 할 수  있으며

인더스강을 내려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요새유적(SD구역)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중요한 건물은 큰 욕조가 있는 대욕탕이다.
 길이 12m,너비 6.9m,깊이 2.4m의 벽돌탱크가 설치되었다.

욕조바닥 벽돌의 가장자리를 석고로 모르타르한 대욕탕은 방수처리 가 완벽했다. 

 


 욕조의 물은 세 개의 우물로부터 공급받는 상수도시설과 물을 빼내 흘려보 내는 배수및 하수도 시설도 갖추었다.

대욕탕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는 작은 욕조가 딸린 방들이 따로 있다.

깨끗한 물을 늘상 공급받아 몸을 청결하게 가 꾼 성직자들의 전용공간인 것이다. 

   BC 2500년쯤 도시계획에 의한 완벽한 도시라는 점은 불가사의로 분류되기 충분하다. 

동시대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움집 정도를 짓고 살던 시대이며

이집트 문명이나 수메르 문명역시 이같은 주거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요새유적(SD구역)과 그 밑의 도시유적 DK구역,노동 자 거주유적 HR구역 등이 기능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들 구역의 모든 건물은 구워 만든 붉은색 벽돌로 지었다.

그리고 우물을 파고 원형으로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우물은 7백개나 되었다. 방수처 리한 상.하수도에도 역시 벽돌을 사용했다.

  도로는 오늘날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정확히 동서와 남북을 이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너비가 10m에 이르는 큰 도로에는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벽돌을 모로 뉘어 깔았다.

도시계획은 물론 도시토목을 맡은 전문 엔지니어가 설계한 도시가 바로 모헨조다로인 것이다.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엄청난 분량의 벽돌이 들어갔다.

고고학자들이 계산해 낸 숫자는 자그마치 8천만장이다.

벽돌을 일정한 규격품으로 세 종류가 생산 되었다.

가장 큰 세로 28cm,가로 16cm,두께 9cm짜리 벽돌은 나무로 구웠다.
나 머지 작은 규격품 벽돌을 굽는 데는 곡물의 껍데기 왕겨를 땔감으로 썼다.

이들 벽돌은 건축용도에 따라 사용되었다.

 오늘날 건축자재용 벽돌강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제품을 대량생산했으나 벽돌공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 았다.  

이 유적이 아직 고대 문명이 밝혀지지 않았던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하라파 유적과 더불어 벽돌의 재료로 대규모 훼손이 진행될뻔 한 일이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문명유적임이 확인되어 지금은 모헨조다로 유적과 더불어 두 개의 큰 인더스문명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모헨조다로 유적은 강의 범람으로 인해, 지표유적 대부분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차츰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보다 분명한 문명유적으로 부각시킨 많은 유물들이 1898∼99년 사이 여기서 출토되었다.

파키스탄 독립이후 최대 의 발굴성과로 꼽히는 여러 돌인장, 소가 끄는 달구지 따위의 테라코타 조각 품들,

무늬도자기와 민무늬도자기 등이 그것이다.

 소 달구지에서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의 그 넓은 길이 허세가 아니었음을 실 감했다.

그리고 돌인장에는 설형문자(楔形文字)가 나오거니와 큰 선박 그림을 새겼다.

이들 모헨조다로의 인장은 파키스탄보다 먼 서역(西域)수메르에서도 출토되었다.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아주 일찍 고유문자를 쓰는 가운데 큰 배를 부려 장거리 해상무역로를 개척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래서 모헨조다로에는 영원한 문명의 빛이 어려있는 것이다.

 유적발굴 개척자인 영국인 고고학자 존 미셜경(卿)은 『

이 도시에 오면 현대 산업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착각이 든다』고 했다.

역시 영국의 고고학자 멀티머 휠러 경은 『이 도시의 설계자체는 뉴욕 브로드웨이를 연상시킨다』는 말로

모헨 조다로가 계획도시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인구 3천∼4천명이 살았을 것이라는 모헨조다로는 스펙터클한 도시였다.

 시민들이 계층에 따라 주거구역을 달리한 가 운데 삶을 살아간 흔적이 역력했다.

사제(司祭)를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도시 설계전문가.건축가와 같은 엔지니어그룹,

상공인과 노동자 계층의 일상이 맞 물려 돌아갔던 것이다.

요새유적(SD구역)에서 내려오면 좀 낮은 구릉에 지배계급주거지(DK구역)가 자리잡았다. 
 
  주택의 욕조나 부엌에서 내 려오는 물은 반드시 하수도로 흘러 들어갔다.

심지어는 2층에서 버리는 물까지도 벽속에 마련한 낙수시설을 따라 하수도 로 배수되었다.

골목길을 따라간 하수도는 꼭 뚜껑을 덮어 청소가 쉽게 이루 어지도록 배려했다.

 

 모헨조다로 도시계획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 하나가 바로 모든 길을 연결한 하수도시설과 쓰레기처리장인 것이다.
지배계급 주거지에는 「족장의 집」과 다른 큰 저택이 있다.


 모헨조다로 출토품가운데 유명한 우두머리격의 두상(頭像)은 족장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 집에서 사제로 여겨도 좋을 사람의 두상이 나왔다고 해서 족장의 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족장의 집은 큰 저택과 함께 대단한 주거문명 흔적을 남겼다.

안뜰을 지나 주택입구로 들어서면 집안으로 통하는 복도가 나왔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직 남아 2층건물이었음을 입증하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이 지배계급 주거지 동쪽으로 돌아가면 현재까지 발굴한 유적의 경계선이 었는데,너비 9m의 큰길이 나있다.

 

 


 DK구역 1번가로 부르는 한길은 노동자계층 주거지 HR구역으로 이어졌다.초소(哨所)처럼 보이는 높다란 건물로부터 시작 한 HR구역 노동자계층의 집들은 비교적 작았다. 오늘날 서남아시아에서 사용중인 구식화장실 모양의 공동화장실도 갖추었 다.
 서남아시아인들의 오랜 관습인 물로 뒤를 닦는데 필요한 세정(洗淨)시설 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모헨조다로 출토품인 「춤추는 소녀상」은  유적지내에 유흥가가 있었거나,

적어도 노동자들의 여흥을 돋을 무희가 있었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독립하기 전에 출토되어 현재 델리박물관이 소장한

이 청동 제 조각의 소녀는 몸에 장신구를 걸쳤을 뿐 옷은 입지 않았다.

 

 

   상공인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VS구역은 노동자지구 북쪽에 자리잡았다.

노동자지구와 상공인지역(VS구역)사이의 십자로가 넓었다.모

헨조다로에서 가 장 길고 넓은 11m 너비의 도로가 교차했다.
  십자로를 건너 왼쪽 초입에 상공 인지역 대표유적 염색공의 가게가 있다.

가게 안에는 다섯 개의 원뿔형 구덩이가 설치되었다.

쐐기형 벽돌로 만든 구덩이가 바로 염색시설이었다는 것이다.

모헨조다로 유적에서는 각양각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돌인장이나 토기 ,우두머리의 두상,소달구지,춤추는 소녀상 말고도 각종 장신구와 일상생활용 품들이 출토되었다.

청동기문명인들인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청동으로 각종 무 기도 만들었다.

또 공,주사위 체이스 말 따위의 출토유물에서는 모헨조다로 사람들의 지혜 를 읽었다.

그러나 모헨조다로 문명은 계승되지 않은 채 단절되었다.

  이유는 다른 문화 에 지극히 배타적인 아리안족의 침입에서 비롯한 무차별 파괴와,

인더스강 범 람에 따른 도시의 수장(水葬)등이 꼽혔다.

그 모헨조다로의 비극은 노동자지 역(HR구역) 한쪽 「죽음의 골목」에서 발굴한 많은 인골(人骨)에서도 어렴풋 이 나타났다.

모헨조다로 문명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오늘날 인도 남쪽 에 살고있는 드라비드족을 그 후예로 추정하지만,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일단 역사무대 뒤안으로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