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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중국/실크로드10일(2014)

실크로드 혜초여행사 여행정보 자료

by 시경아빠 201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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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욕관 성루
만리장성의 가장 서쪽에 있는 가욕관 성루는 만리장성의 서부 끝자락이자, 동서교통로의 요지이고 실크로드를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 항상 400여 명의 병력이 상주했던 군사요충지였다. 중국인들은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을 '천하제일관'이라고 하고, 서쪽 끝인 이곳 가욕관을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고 불렀다.
고창고성 (高昌故城)
한대에서 원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간이나 신장지구의 정치 및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여 왔다. 그 중에서도 499년 한족인 국문태가 부흥시킨 고창국 시대는 도성으로서 가장 번영하엿던 시대였다고 한다.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으로 가던 현장 삼장이 고창 왕의 간청으로 이 땅에 머물면서 한달간 불교 강의를 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교하고성
고대 서역 제국 중의 하나인 교하국, 차사전국(車師戰國)의 도시로 서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이었다. 교하국은 실크로드의 천산남로와 천산북로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을 차지했던 왕국이다. 또한 진한시대부터 차사전국의 수도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인구 6,500명을 가진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교통 요충지였다. 비록 잔해이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이 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벽돌로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세월이 가도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안탑
대안탑은 652년에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자은사대안탑'(慈恩寺大雁塔)의 정식명칭으로 만들어졌다. 자은사는 648년에 당나라 고종이 일찍 사망한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의 명복을 빌고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慈母恩德)에서 지은 절이다. 7층의 누각식 전탑으로 총 높이가 64m에 기반부 둘레는 25m이다. 외부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탑 내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갈 수가 있다. 매 층의 사방에는 각기 하나의 아치형 문이 있어서 먼 곳까지 내려다볼 수도 있다.
막고굴 (莫高窟)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돈황에는 구법승, 대상, 병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융성뿐 아니라 돈황예술을 꽃피우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흔적이 바로 세계적인 불교유적지로 유명한 막고굴(莫高窟)이다.

막고굴은 서기 366년 승려 낙준(樂樽)이 명사산(鳴砂山)과 삼위산(三危山)에 이상한 빛이 있음을 알고 석벽을 파서 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 들이 드나들면서 하나, 둘씩 굴을 팠으며 그렇게 파게 된 크고 작은 굴의 전체 수가 약 천 개 가량이 된다.

그 수많은 굴 중에서 17번이라 번호가 붙여진 굴 속에는 우리나라 신라 혜초 스님이 남긴 '왕오천축국전'이 다른 보물들과 함께 잘 보전되어 있다. 1,00개의 굴이 있다 하여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에는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어두운 동굴의 천장과 벽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그림에는 한결같이 어떤 종교적 고행이 느껴지며, 또한 각 굴의 천장화는 매우 정밀하고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와 예술의 피땀어린 결정체이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이 되었지만, 아쉽게도 약탈로 인해 수만점이 해외로 유출되어 현재에는 10여개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분산 보관되고 있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막고굴문화재의 보호와 연구를 강화하고 있으며, 1961년에는 국무원에서 막고굴을 중점문화재로 지정하고 막고연구원을 설립하여 보호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맥적산 석굴
맥적산 석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돈황석굴과 용문석굴,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4대 석굴로 꼽히고 있다. 맥적산 봉우리 곳곳을 파고 새겨서 조성한 석굴로서 주변에 인적이 드물고 큰 절이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불교 걸작이다. 맥적산은 하부가 좁고, 상부 정상이 더 넓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데, 산모양이 보리 짚단을 쌓아놓은 형태같이 보인다하여 얻게 된 이름이다.
명사산 (明沙山)
명사산은 둔황의 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모래산이다. 남북으로 20㎞, 동서로 40㎞ 정도 넓이의 모래산군(群)으로 곳곳에 뾰족뾰족한 모양의 산들이 마치 수면에 물결이 이는 모양으로 늘어서 있다.
베제크리크 천불동 (千佛洞)
위구르국 왕가의 석굴 사원인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6~14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불상과 불화가 수장된 불교 미술의 보고였다고 한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이슬람교도들의 침공과 외국 탐험대의 약탈로 석굴안의 불상 대부분이 모습을 감추었다.
병령사 석굴 (炳靈寺石窟)
병령사 석굴은 마른 황토흙과 풀 한포기 없는 바위로 된 수직으로 선 절벽에 있다. 절벽에 새겨진 불상들이 60m 정도의 높이로 약 2km에 걸쳐서 늘어선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의 불상들은 서진 때인 4~5세기 경부터 조각되기 시작하여 북위, 북주, 수, 당, 명나라 때까지 계속적으로 새겨진 불상들이다.
병마용
현재 진시황릉에서 유일하게 발굴이 이루어진 병마용갱은 20세기 최대의 발굴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병마용은 황제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2,000년 이상 전에 흙으로 빚어 구운 실물 크기의 병사와 말, 전차 등을 일컫는 말로 사후에도 천하를 지배하고자 했던 진시황의 갈망을 살펴볼 수 있다.
섬서역사박물관 (陝西歷史博物館)
당(唐)대의 건축 양식으로 1991년에 개장하여 원시시대의 출토물부터 주, 진, 한, 수의 시안 근교 출토품들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특히 당대의 능묘에서 출토된 커다란 색채벽화가 유명하다.
소공탑 (蔬公塔)
신강 최대의 고탑(古塔)으로 이슬람 양식의 독특하게 지어진 탑이다. 탑외부는 전부 청회색이며, 44m높이의 원형탑이며, 탑 안에는 72개의 나선형 층계가 꼭대기에 이어져 있다. 매년 이곳을 참관,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신강위구르박물관 (新疆維吾爾自治區博物館)
1958년에 세워진 박물관으로서, 신강위구르자치구 내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문물들을 수장·전시하고 있다. 이슬람 양식의 모스크 건축 외관이 인상적이며, 약 2,000점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동서교류의 한 증거로 페르시아나 로마의 옛날 화폐 등도 있다. 특히 3,200여 년이나 되었다는 여자 미라를 비롯하여 자치구 내의 12개 소수민족들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진열실 등이 전시가 잘 되어있다.
아스타나 고분군
고창국 시대의 귀족 묘로 약 600기 정도의 고분이 있다. 꽃과 새가 그려진 벽화가 남아있는 묘실과 유리상자에 2기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는 묘실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기후가 극도로 건조하여 보존상태가 좋다.
천산천지 (天山天池)
천산산맥의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박격달(博格達:5,445m)봉의 뒤쪽에 위치한 호수이다. 해발 1,910m의 짙푸른 빛을 발하는 천지는 우루무치에서 오자면 넓게 펼쳐진 사막을 달리다 불현듯 나타나는 푸른 오아시스이다.
카레즈
카레즈란, 관개용 지하 수도로 만리장성, 경항대운하와 함께 중국 고대 3대 공사의 하나로 꼽힌다. 칸얼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천산 산록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 파들어간 지하 수도의 총길이는 3,000km에 이른다. 초목이 무성한 오아시스 투루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수리 시스템이다. 투루판의 명물 포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카레즈 덕분이다.
쿠무타크 사막 (kumutake desert)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시로 연결되어 있는 모래사막이며 사구가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다. 역사적으로는 실크로드의 일부로서 동서 문화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색있는 경관을 자랑한다.
화염산 (火焰山)
대부분 홍사암으로 되어 있는 화염산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화염산의 불길 때문에 고초를 겪는 사건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천산의 억센 힘줄이 불끈 솟아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 산은 불길이 치솟는 듯이 보여 그 이름도 화염산이라 붙여지게 되었다.
화청지
화청지는 당대 현종에 의해 조영된 온천 별궁으로 현종과 양귀비가 이곳에서 함께 목욕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탕과 문물 진열실이 있다. 수질이 매우 깨끗하고 항시 43℃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질 좋은 온천으로 1936년 서안 사건 때 장개석이 붙잡혀 감금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