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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

자본주의 발달괴정(펌글)

by 시경아빠 2010.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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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여러 발전 단계를 거쳐오며 진화해왔다.

 

그 진화 과정을 통해 사회 구조는 새롭게 재편되었고 인류 문명의 발전도 촉진되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이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 즉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은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쇠퇴했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유럽의 중세 자본주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겠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여러 이민족들이 잇따라 침입해오면서 혼란에 빠진 유럽 사회는 잉여분의 생산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상업의 발전과 연결되는 무역은 '안전과 질서'의 소멸로 마비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잘개 쪼개진 시장은 상품의 소화 능력은 줄여놓았다.

 

문화와 경제, 정치, 군사 모든 면에서의 퇴보로 사실상 물물 교환 경제로 후퇴한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출발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를 개선시킨 것은 농업 혁명이다.

 

8세기 이후 시작된 농업 혁명은 크게 삼포제와 비료 작물, 쟁기를 비롯한 농기구의 개선으로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비해 경지당 생산력이 2배에서 4배까지 급증한 생산력의 급증은 '자급자족' 단계에 머물러 있던 유럽인들에게 잉여 생산물을 제공해주었다.

 

이렇게 발생한 생산의 잉여분은 가까운 마을과 도시에 팔려나가면서 '근거리 무역'이 제한적이나마 부흥하기 시작했다.

 

근거리 무역의 부활이 상품 화폐 경제의 부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로마제국 쇠퇴 이후 기축 통화의 지위를 차지한 金貨의 가치가 너무 높은 탓에 시장에 이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은 단위의 물자 유통에서 금화의 이용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銀이나 銅이 통화의 지위를 탈환하기에는 화폐를 균일하게 발행하고 그 신뢰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국가들이 정부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수도조차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초보적인 상태'에 불과한 탓이었다.

 

이 상황에서 상품 화폐 경제의 부흥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를 개선한 것은 정치 상황의 변동이었다.

 

10~12세기에 걸쳐 완숙기에 접어든 봉건체제의 성숙으로 국가의 통치 시스템이 어느 정도나마 각지에 미치게 되었고, 마자르족과 노르만족, 이슬람의 위협이 감소하여 무역의 회복에 필수적인 질서와 안정이 찾아왔다.

 

무역의 회복은 로마 제국 말기 이후로 줄곧 쇠퇴해오던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상거래의 범위는 근거리에서 원거리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상거래의 확대는 단순히 잉여 생산물자를 판매하던 기존의 생산자들에게 주문을 받고 판매하는 주문제 생산 시스템을 취하게 하였으며, 마침내는 상인이 자본을 축적하여 생산자를 지배하는 메뉴팩쳐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상업분야에서의 발전으로 농업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씨앗이 상업 자본주의로 꽃피게 되었다.

 

상업 자본주의의 발달은 대규모 상거래에 필요한 복식 부기의 발명, 모든 단위를 통일하는 도량형의 통일, 모든 것을 판매할 수 있도록 수치화하는 수량화 혁명, 시계의 발명, 인쇄술의 도입과 확대를 가져와 유럽 사회의 풍토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모든 것.. 심지어 시간까지 자본으로 치환하여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상업 자본주의의 발달은 기존의 길드제 또한 붕괴시켰다.

 

생산력을 통제하고 노동자의 확보에 매우 장애가 되어온 길드는 자본주의의 도도한 발전앞에 붕괴되었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자유 상인과 주식 회사였다.

 

단순히 머리수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는 투자 방식 대신 자본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된 주식<스톡(말뚝 단위)>만큼 이익금을 배분받고 그 위험을 지는 유한 책임의 주식회사 제도의 시행은 상업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다.

 

자본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이 새로운 풍토 아래 자본을 축적한 시민 계층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도시의 소유권을 왕과 귀족으로부터 사들여 자유를 얻는가 하면, 대학을 세우고 행정과 법률관 등의 관료직을 차지함으로써 일정한 영향력도 획득했다.

 

하지만 봉건주의, 그리고 그 최고 단계인 절대왕정 하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한계에 이르렀다.

 

중상주의 정책이 아무리 자국의 산업을 보호 육성한다곤 하지만 '고비용 저효율'의 절대왕정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시민 계층이 부담해야 하는 조세 부담이 너무나도 무거워 정부의 존재 자체가 시민들에게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주도하여 17기 네덜란드에서의 시민 혁명이 일어나 스페인 절대왕정에 저항한 것을 시작으로 18세기에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혁명 등이 줄지어 일어나 정부 자체를 시민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거센 도전으로 각국은 입헌군주정 혹은 공화정, 시민 군주정 등으로 개선되어 시민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게 되었다.

 

이렇게 개선된 여건하에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절대왕정 말기에 시작된 산업 혁명이 파급되면서 대규모 자본이 집중되는 공장제 기계공업이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혁신으로 상업 자본주의는 산업 자본주의로 대체되었다.

 

단순히 무역으로 이익을 얻는 구조에서 시장을 지배하는 산업 생산의 힘으로 이익을 얻는 단계로의 이행이었다.

 

진보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제 각국은 보다 원료를 값싸게 획득하고 완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넓은 원료산지와 시장을 얻고 싶어하게 되었다.

 

이는 당연히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식민지 획득 경쟁으로 촉발되었다.

 

16세기만 하더라도 단순히 재화 그 자체에만 목적을 두고 식민지를 획득해온 유럽 열강들이 이제는 재화의 창출과정에서 얻어지는 이익 자체를 노리고 식민지를 얻으려는 더 치열한 이전투구가 시작된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의 촉진은 제국주의 경쟁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장에 비해 과도한 생산품을 쏟아내어 재고품을 양산하게 되었다.

 

재고의 축적은 경기의 불황으로 나타나 유럽 각국은 1870년대 이후 10년주기로 공황에 시달리면서 더욱 식민지 경쟁에 목을 매달게 되었다.

 

좁아진 시장은 블록 경제를 촉진했다.

 

각 열강들은 저마다 자신의 식민제국에 무역 장벽을 세워 상대의 상품 유입을 차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요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기업을 인수, 합병, 제휴함으로써 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 단계에 이르러 자본주의는 금융 독점 자본주의로 나아갔다.

 

금융 독점 자본주의 단계의 기업들은 은행을 지배하여 자금력을 확보하고 경쟁사를 인수하여 시장 지배력을 높여 독점적인 파워를 휘두르고 생산품의 공급 가격을 마음대로 조절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을 수출하여 이윤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금융자본주의 자체는 16세기 런던 무역시장의 출발에서 태동하긴 했지만 금융이 산업을 지배하고 자본주의 제국을 통제하는 단계에 이른 것은 이 금융 독점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였다.

 

금융 독점 자본주의는 독일의 콘쩨른, 미국의 트러스트 등의 거대 기업연합군을 형성하여 경제 구조에서 대기업군이 차지하는 비중을 절대적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 유행한 철강왕 카네기나, 자동차왕 포드, 석유왕 록펠러 등의 호칭은 해당 산업의 50~90%를 지배한 독점 자본가들의 위력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금융 독점자본주의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반 트러스트법'이 시초가 되어 와해되기 시작하더니 1929년 경제대공황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하게 되었다.

 

국가가 시장을 자유방임하던 이전의 시기와 소련식의 계획 경제 개념이 도입된 '국가 개입형' 시기와 완전히 달라졌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형태는 '수정 자본주의'라 불리웠다.

 

케인스 경제학에 기반을 둔 신 경제 시스템은 2차대전을 거치며 공고해졌다.

 

경쟁 상대인 사회주의 체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그 지위는 굳건해지는 듯 했지만 1970년대 영국의 경제 위기로 케인스 경제학은 시험대에 올랐다.

 

영국인들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시장의 자유를 확대하고 국가의 개입을 축소하는 신 자유주의를 경제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른바 신 자유주의가 수정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대세로 떠오르기 시작한 때였다.

 

물론 레닌과 마르크스는 소련 건국 당시에도, 그리고 이 시기에도 자본주의의 대안은 사회주의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정확하게 말하면 공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기에 모순이 많았다.

 

신 자유주의는 그렇게 30년 이상 맹위를 떨치며 각국에 다시 파급되었으나, 그 무분별한 자유 방임주의는 다시 한번 대공황을 불러왔다.

 

허상에 불과한 숫자, 그리고 떠도는 추상적인 개념까지 수치화하여 자본으로 계량하여 이윤을 추구한 극단적인 비도덕적 자본주의는 2008년의 금융 대공황과 함께 붕괴되었다.

 

이제 그 위기를 떠맡은 것은 국가의 재정지출 확대에 기반을 둔 케인스 경제학과 수정 자본주의 체제이다.

 

앞으로도 자본주의가 더 진보할 것임은 분명하다.

 

현재의 수정 자본주의 단계에도 약점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한 새로운 모델이 언제쯤 제시될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