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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역사·사찰문화

가야인들의 뿌리는 누구일까?

by 시경아빠 201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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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의 명칭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구야(狗耶)라고도 하며

외부에서는 임나(任那)라고도 불렸다.

 

 

2. 가야의 위치와 발전, 멸망

 삼국시대 대부분 동안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소국의 연맹체였다. 동쪽으로 신라, 서쪽으로 백제를 접했다.

 

 

 

서기 전후로 김해 등지에 있던 구야한국(狗邪韓國)을 중심으로 변한의 소국들이 결집해 전기 가야 연맹을 성립하였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고령)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을 만든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결국 562년 멸망한다.

 

 

금관 가야의 역사와 문화 체험 => 대성동고분박물관

 

 

 

 

 

 

 

 

3. 가야의 멸망원인은 ?

삼국과 달리 각 소국이 유달리 강력했던 관계로 특별히 중심이 된 강국이 등장하지 못해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국가체제가 완성되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수준에서 머물렀던 것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된다.

 

 

 

 


 

4. 가야 건국 신화

삼국유사》  나라가 없던 때에 백성들이 하늘의 명을 받아 구지봉에 올라 “거북아,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하며 제사를 지내자, 하늘에서 붉은 도자기에 쌓인 황금 알 여섯 개가 내려왔다. 12일이 지난 후 가장 먼저 깨어 나온 수로를 백성들은 가락국의 왕으로 모시고, 나머지 다섯 알에서 나온 사내아이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는 바다 건너 먼 아유타국에서 왔는데,

이때 가지고 온 파사석탐은 허왕후의 능 앞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여기서 5가야란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이고, 수로왕이 남은 성이 가락국금관가야이다. 그러나 6가야에 대해서는 다른 전승도 많은데, 《고려사략》(高麗史略)은 금관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의 다섯 가야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출처 필요]

 

 

 


 

 

일반에는 가야연맹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요즘은 가야제국(諸國입니다. '모두 제' 자에 '나라 국' 자를 쓰는 제국)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으로부터 기원한 한반도 남부의 여러국가를 총칭하는 말이며 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등의 국가가 모인 국가입니다. 또한 4세기경에 등장해서 6세기경에 멸망할때까지 통일된 국가나 정치체계를 가지지 못한것은 유명한 사실이죠.


사료에선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전에서 처음 나온다고합니다. 신라등의 주변국에선 이들을 통털어 가야,혹은 가라라고 불렀으나 본래이름은 가락국,금관국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선 임나라고 불렀구요.


삼국유사엔 6개의 국가, 일본서기에는 10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엔 24개의 국가가 거론되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야 연맹설이 주류였으나 07년도 이후에는 제국(諸國)설이 정설화되고있는게, 이 학설에선 가야는 연맹이 아니라 국명만 비슷한 별개의 국가들이었으며 장기간의 연맹체계를 잡을수도 없고 그런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는점을 이유로 합니다. 


가야는 철기문화가 유명한데 가야의 유적중 제철공정이 나타난 유적에선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모든 제철과정이 포함된 유적이라는것과 화폐가 철이었고 발달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철기 갑옷,무기등을 제작했습니다. 또한 이 철은 중국,일본등에서 사러오기도 했고 가야의 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죠.


특히 왜와 무역을 자주하고 문화도 교류되어감에 따라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했다고 합니다. 또한 신라와 백제는 가야의 국가들을 친백제국가,친신라국가등을 만듬으로 양분되기도 했습니다. 이후엔 몇번의 전쟁을 통해 결국 일부는 백제, 대부분은 신라에 정복당하며 끝이 났습니다.


이후엔 김수로왕의 12대손인 김유신이 신라의 진골에 편입되고 신라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하죠.

 

 


 

 

가야

 

 

 

 

12개의 크고 작은 정치 세력


보통 가야는 백두대관의 동쪽과 낙동강의 서쪽인 영남의 남서에 위치한
10여개의 소국연맹체를 말함

 

 


4세기까지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5세기부터는 경북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가 가야연맹체를 이끔

 

고령의 대가야는 낙동산 큰 물줄기를 타고 바다로 쉽게 나감
그러나 5세기 이후에는 더이상 낙동강을 이용하지 못함
5세기 이후 가야와 신라가 낙동강을 국경선으로 사용함
예전과 같이 교통로로써 역활을 못함

 

5세기 이후 계속된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 방어에 급급한 상황
이틈을 이용해서 대가야는 주변지역으로 영토를 넓히고
바다를 건너 일본 중국과도 교류를 함

 
5세기 경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대가야는

백두대관을 넘어 호남 동부지역까지 그 세력을 널펴나감

섬진강루트를 보호하기 위해 대가야가 산성을 쌓음
대가야는 섬긴강 루트를 뚫고 남해바다로 나가 일본 중국과 교류함
섬진강은 대가야가 개척한 새로운 대외교역 루트이다

 

섬진강 루트는 일찍이 4세기후반 백제(근초고왕)가 일본과 교역하던 곳이다
 
5세기 후반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까지 옮겨야 하는 상황에 처함
475년 위례성이 함락되고 공주(웅진)으로 천도
이 틈에 대가야가 섬진강 루트를 확보
 
6세기 초 백제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상황이 달라짐
백제 무령왕은 대가야가 장확한 섬진강 루트 회복에 나선다
이상황에서 무령왕은 왜의 세력도 포섭함
 
섬진강은 일본과의 교통로를 누가 장확하는가? 하는 교통로의 싸움
 
대가야는 6세기 중반부터 점차 세퇴의 길에 들어선다
고구려의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고전하던 백제와 신라가
점차 정국의 안정을 찾고 체제를 정비한 후에 가야를 찾아하려던 야심을 본격화 함
 
대가야는 섬진강 루트를 백제에게 빼앗긴 6세기 초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로인해 대외진출로를 상실하고 왜와의 교역권도 잃게 됨
 
계속되는 백제의 압박에 친신라정책을 편다
522년에는 신라와 결혼동맹까지 맺는다.
 
신라는 당시 법흥왕때 대가야연맹의 왕이 신라에 협조관계를 요구하니
이것을 빌미로 투쟁없이(전쟁) 삼킬수 있는 방안으로 결혼동맹을 선택함
결혼동맹은 불가 7년만에 깨짐(529년 변복사건)
 
이후 진흥왕때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패배함
관산성 전투의 참패는 대가야에게도 치명적이였다.
백제의 - 군대1명 왜군1천 나머지1만9천명은 가야군으로 추정(총사망자2만9천명)
1만9천명의 가야군이 사망
 
신라 진흥왕은 561년 창녕 가야세력을 공격해 멸망시킨다. 그리고 척경비를 세움
창녕에 결집한 신라군은 562년 고령으로 진격한다.
대가야는 신라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항복함.가야역사(500년)의 막을 내림
대가야가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춘건 5세기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역사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북한 지역보다 중국 쪽에 폭넓게 분포된 유적지로 인해 고구려 역사의 중심이 중국으로 치우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결국 그것은 '동북공정(東北工程)' 이라는 참담한 현실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이 책『살아 있는 가야사 이야기』의 저자 박창희는 이러한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이 우리 스스로 다져놓은 역사의 토대가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우리의 관심과 연구가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더 늦기 전에 튼튼히 다져놓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700년 역사'를 지닌 고대왕국, 가야이다.

 

 


가야는 서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대왕국이다. 불행히도 이것은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4~6세기 고대 일본 정권이 200여 년간 가야 지역 등 한반도 남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주장한 것에 많은 서양인이 호기심을 보인 탓이다.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일제강점기는 그들의 정치적 복고인 셈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가야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자취를 풍성히 남김으로써, 한국고대사의 화려했던 한 시절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남은 일은, 그동안 소외당하고 농락당한 가야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후손들의 노력뿐이다.

 


한국고대사의 재발견, 문화왕국 가야!
최근 20년간 한국고대사의 성과를 되돌아보면 가야사 연구가 단연 돋보인다. 가야사 논저는 물론 발굴보고서나 연구자 수에 있어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를 훨씬 웃돌고 있다. 이렇듯 가야 연구가 활발한 것은, 뒤늦은 발굴 탓도 있지만 가야 지역에서 모습을 드러낸 고분 및 유물들의 가치가 역사책을 새로이 써야할 정도로 강력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마인물형 토기, 판상철부, 미늘쇠, 철갑옷, 왕묘 등 발굴 유물 하나하나마다 신비에 싸인 가야를 더욱 경이롭게 만들며 우리 고대사를 화려하게 채색한다. 이제 가야를 무시하고 삼국만을 논하게 되면 한국고대사는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줄어드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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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야의 정체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가야'라는 말조차 국명인지, 지역명인지 논란거리이며, 정확한 영역 역시 아직까지는 미스터리다. 철기·토기를 바탕으로 역동적인 문화 왕국을 이루고도 무슨 이유로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졌단 말인가! 수로왕의 부인 허왕후의 고향은 과연 인도인가, 월광태자와 우륵은 각각 무슨 사연으로 가야를 등졌는지, 망국의 유민들은 진정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등 온통 의문투성이의 역사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는, 놀라운 철기술과 선진 토기제작술, 높은 농업생산력, 기마전단을 보유한 전쟁수행능력, 바다와 강을 이용한 항해술과 해운능력 같은 역동적인 가야의 참모습에 우리는 민족 문화의 원형을 다시 한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나는 빛나는 역사, 가야의 모든 것
이렇듯, 국내외 많은 연구자의 관심을 끌고 있는 가야사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바로 『살아 있는 가야사 이야기』이다. 가야의 역사와 가야인의 생활상은 물론 최근의 연구 상황까지 가야사의 전체 흐름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가야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 한 땀 한 땀 조각보 잇듯 복원돼가고 있다. 때로는 청동솥 하나, 토기편 하나를 두고도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오가기도 하지만 그것은 분명 우리의 역사를 찾아가는 의미 있는 과정이다. 저자는 또한, 가야의 원류를 느낄 수 있는 중국부터 가야문화의 우수함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일본열도까지 직접 발로 뛰어, 그야말로 한 편의 생생한 역사로 가야를 복원하였다.
저자와 함께 가슴 뜀의 현장, 700년 가야왕국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가야인들의 뿌리는 누구일까?

 

1. 대성동에서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역추적

 => 북방민족인 선비족과 일치 ??? => 결론 : 뭔가 다른 것이 있다.

 => 선비족보다는 부여족일 가능성이 높다.

 

 

 

<대성동 고분의 미스터리 - 가야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초대형 목곽묘 발굴! 가야 미스터리는 풀릴 것인가?>
지난 6월,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초대형 목곽묘 2기가 발굴됐다. 2기의 묘는 각각 88호분과 91호분으로 명명됐다. 두 목곽묘는 베일에 싸여있던 가야사의 비밀을 풀 중요한 단서다. 88호분에서는 고대 일본과의 관계를 밝혀줄  일본 고유 유물인 파형동기가 나왔고, 91호분에서는 중국 선비족 계통 유물이 출토됐다. 1990년 대성동 가야 고분군의 발굴을 시작한 이래 다시없을 기념비적인 성과로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91호분의 비밀 - 가야인과 중국 선비족의 관계는?>
91호분에서 출토된 부속품들은 주로 말(馬)과 관련이 있다. 같은 무덤에서 발견된 3구의 시체는 순장 풍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북방 유목민족의 고유문화로, 중국 선비족의 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과연 가야인과 선비족은 무슨 관계일까?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선비족의 발원지인 중국 알선동과 라마동으로 향했다. 제작진을 통해 최근 발굴된 대성동 유물을 처음 확인했다는 요녕성 고고학 연구소의 톈리쿤(田立坤) 교수는 뜻밖에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대성동 고분에 묻힌 자들은 부여인인가?>
대성동 고분과 유사성을 보이는 중국 라마동 고분군은 지금껏 선비족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톈리쿤 교수는 라마동 고분군이 부여인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라마동과 유사한 대성동 고분의 주인공 역시 부여인이 아닐까?

 


2~3세기 경 전성기를 맞은 부여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인 중국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3세기 말부터 선비족에 밀려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때 부여인이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와 지금의 김해에 정착해 가야의 지배층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스페셜은 대성동과 라마동 고분군의 유사성을 집중 분석하고 가야문화의 뿌리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을 소개한다.

 


<88호분 - 파형동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발굴 직후, 이례적으로 수십 명의 일본 고고학자들이 대성동을 찾았다. 일본 언론의 취재도 뜨거웠다. 이번 발굴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일본 고유의 유물이라고 알려졌던 파형동기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파형동기는 바람개비 모양의 청동제품으로 4세기 일본 야마토 정권의 왕들이 방패의 장식품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일본 지역을 제외하고 대성동 고분군에서만 유일하게 확인되는데 이번에는 무려 12점이 발굴됐다. 한국과 일본 양국을 통틀어 한 고분에서 가장 많은 수가 발견된 것이다. 이번 파형동기의 대거 출토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