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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중국/실크로드10일(2014)

실크로드 6일차 -세계 최대의 불교유적지 돈황 막고굴 (왕오천축국전)

by 시경아빠 201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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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막고굴 관광 안내소

 

돈황 막고굴로 이동해서 8시30분 첫타임 입장

 

8월부터는 이곳을 통해서 입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시설이 생기면서 부터 관람 비용이 전보다 60위엔이나 올랐다고 한다.

 

 

 

동서 무역로(교통로) 인 실크로드 지도

 

 돈황은 

 

실크로드 화서회랑에 있는 하서 사군 (우웨이, 장예, 주취안, 둔황)의 마지막 도시이다.

이 둔황을 중심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경계로 천산 북로와 천산 남로로 나뉜다.  

그래서 둔황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도시이다. 

 

 

 

표를 구입하여 실내로 들어가면

 

막고굴 관련해서 제1영상관에서 막고굴의 탄생과 변천 과정(10분)을

 

제2영상관에서는 막고굴 석굴과 내부 벽화(15분) 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문제는 중국어로만 들을 수 있다는 사실 ...

 

 

 

 

 

 

 

참고로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은 금지이다.  

 

 

 

 

셔틀 버스를 타고 막고굴로 이동 (20분 소요)

 

 

들어가는 진입로는  포장공사가 한창 진행중

 

 

 

 

 

진입로 입구에는  백양나무(자작나무 아님?) 들이 많이 보인다. 

 

은색깔로 된 통옷을 입고 있는데 층층마다 여러 개의 눈(eye)을 갖고 있다.    

 

*사시나무로도 불리는 백양나무는 버드나무과이며 자작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한 나무로 분류계통상 전혀 다른 종류의 나무입니다. 

자작나무는 껌의 원료로 쓰이는 자일리톨을 추출할수 있으며 봄철 수액채취에 이용되는 나무입니다.

수피에 종이 같이 껍질이 벗겨지는 모습이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만리장성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서 인지  

 

중국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서양인들이나 일본인들까지 이곳에서는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일본인을 싫어한다고 한다.

 

과거 만주 사변과 영토 영유권 문제로 인해 서로 감정이 좋지않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위안부 문제나 독도 문제처럼

 

 

 

 

돈황을 대표하는 막고굴.

 

내부에는 96호굴이 있다.

 막고굴중에서 가장 큰 대불로 높이가 35m

목을 90도 꺽어야 부처의 얼굴을 볼 수가 잇다. 

당나라 측천무후때 조성한 것으로 자신을 형상화한 것인지 여성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신라 승려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

총 길이 1.8km 구간에 492개의 석굴사원을 조성.

 

서기 366년 불교를 전하기 위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갔던 낙준 스님이

수행할 곳을 찾아 이곳을 지나가다 

삼위산이 금빛으로 둘러쌓이고 그곳에서 천불의 붓다가 서 잇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것은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삼위산 맞은 편에다가 석굴을 지은 짓고 그 안에서 수행을 한 것이 시초이다.

막고굴은  서기336년 (전진(동진)시대) 부터 원나라 때 까지 1,000년동안 완성된 것이다.

 

 

 

 

 

돈황의 중국의 3대 석굴 중

맥적산 석굴은 소조(塑흙빚을 소, 造)가 유명하고, 

 

운강 석굴은 규모가 큰데 반해,  

돈황 석굴은 굴이 아담하고 특히 벽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당나라 때 벽화가 가장 아름답다.

돈황의 벽화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더 이유는 건조한 날씨 덕분이였다.

 

 

명사산의 동쪽 절벽에서 남북으로 1.8km에 결쳐 파놓은 석굴로 석굴 수가 1천개 이상되어 천불동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현재 492개 동굴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수나라 시대(140개)와 당나라 시대(111개)의 석굴이 가장 많이 있다.   

 

 

 

 

와불이 있는 남측 석굴

처음보는 순간부터 왠지 정감이 가질않는다.

어떤 이유일까?  맥적산 석굴과 병령사 석굴을 보고 나온 탓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을 해보니 답은 원래 있던 암벽 출입구를 인위적으로 덧붙여서  볼쌍 사납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습이 보존되지 못하고 현대인의 시각으로 탈바꿔 놓은 모습을 보니

당연히 신비감과 경이로움이 생성되질 못한 것이다. 

막고굴의 외형 모습은 쉽게 도시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상품 덩어리에 불과해 보인다.  

 

 

막고굴이 세상에 알겨진것은 100여년전

발굴 초기 많은 문화재를 약탈 당한 후

중국 정부는 1960년 부터 콘크르트와 문을 설치하여 하루에 10여개의 석굴만 공개하고있다.

 

 

 

 

 

 

막고굴 130 남대불 (남쪽 큰 부처)

막고굴에서 두번 째로 큰 부처.  통통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을 짓고있다.

 옷 주름도 섬세하고 특히 왼손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가장 아름다운 부처의 손으로 꼽힌다.

 

 

막고굴 관람 방법

 단체 관광의 경우 해설은 중국인 한국어 담당 해설사가 직접 안내와 설명을 해준다.

한국말이 아직 많이 서툴고 단어가 잘 연상되지 않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주고 있다.

막고굴에 있는 석굴을 다 둘러보지는 못하고 대표적인 작품 10여점 정도만 공개하고 설명을 덧붙여준다.

맥적산 석굴이나 병령사 석굴처럼 이곳도 문을 자물쇠로 굳게 채워진 둔 곳이 많아

개별 관람객들이 석굴 내부로 들어가서 관람하는 것은 싶지않아보인다. 

 

 

 

 

97굴 벽화

 

 

 

 

 

217호 벽화

 

 

 

 

 

 

71굴

 

 

 

 

 

 

 

과거 벽화와 현재 벽화 모습 

 46굴 벽화의 발굴 당시의 벽화와 최근의 벽화모습을 들여다보니 

당시 화공과 화가들의 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평생을 업으로 살아왔던 장인의 손길과 부처를 대한 애듯함이 함께 작품에 깃들여져야 명작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의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마음까지 기계에 담을 수 없다고 본다.

 

 

 

 

 

 

 

 

148 굴

 

실제의 모습보다 사진이 훨씬 더 화려해보인다.

 

 

 

굴모양이 관모양 처럼 생겼다.

 

 

 

외부 천정에도 일부 벽화들이 보존

 

 

 

249굴

 

막고굴 벽화는 초기 수행자들이 탱화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 하나 모방을 해서 탄생된 예술작품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작은 굴이 매우많은데

훼손될까봐 일부로 비공개를 한 것이 많다.

 

 

 

 

 

 

 

 

 

 

259굴  -

북위시대 조성된 석굴로 동양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선정불이 있다.

쌍불로 아잔타 석불과 유사하다.  

쌍불은 목심불로 나무에 기둥을 세우고 진흙을 붙여서 만든 것이다.

 

 

 

 

 

 

 

 

275 굴

 특별한 동굴로  미륵보살 상의 탈의하고 있다.

 

 

 

 

 

 

돈황 막고굴은 건조한 기후와 어두운 환경때문에 잘 보존되어오다가 

1900년 초 서구사회에 널리알려지면서  수많은 고서와 불상 벽화가 밀 반출됨

 

벽화는 황토와 볏짚을 섞어서 한번 바른 뒤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채색을 하엿다.  

 

 

 

 

23 굴

 

 

 

 

 

16, 17굴

정면의 불상이 16굴,  출입구 우측 벽의 아치형 문이 17굴이다.

16굴 내부는 규모도 벽화가 정말 크고 화려한데 비해서, 17호굴은 아주 작은 방 크기 정도로 내부는 횡하고, 회색벽만 보일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17호굴에 관심이 더 간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7굴은 16굴 작업을 하던 왕원록 도사가 아편을 내뿜은 연기가 바위 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발견 당시 그 굴 안에는 경전을 비롯한  고문서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럼 이굴을  왜 봉쇄했을까?

 서하(송-여-서하-금-원) 가 돈황을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불전을 보호하기 위해 굴을 막고 봉인한 것이다.

 

 

왕도사 17굴을 발견하고서 난주(감숙성의 주도)에 보고하니 잘 보관하라는 지시를 받고 철문으로 봉인을 하였다.

하지만 왕도사가 영국 탐험가 스타인에게 돈을 받고 고문서들을 넘겨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후 프랑스 연구가 페리오가 이곳을 찾아와 문서를 또 유출해갔다.

 바로 이 프랑스 학자 '페리오'에 의해 '왕오천축국전'의 저자가 '혜초'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16, 17굴 입구